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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⑧] "우리 만주로 갑시다" 독립운동 나선 23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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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8-0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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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헌, 험난한 路程에 맞서다

[중국 안동현(오늘날 단둥시) 시가지 전경]


1929년 2월 22일 매헌은 마을 청년 5명과 ‘위친계’를 조직했다. 이후 학예회 공연으로 인해 일경의 감시로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자, 매헌은 이 나라를 떠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며, 장남으로서 집을 떠나는 부담과 부모공양 문제로 늘상 마음 한켠에 고민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이해 여름, 매헌은 사랑스런 두 사람과 이별을 해 심적(心的) 고통이 유독 컸다. 눈병을 앓던 맏딸 안순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농민운동을 하느라 딸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매헌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안순을 가슴에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의 어른 윤두더지 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바로 이 무렵, 매헌은 망명에 대비한 듯, 10월 10일(실질적인 위친계 설립일) 위친계를 확대·강화해 부모공양의 길을 마련했다. 그리고 수시로 동생 남의에게 ‘효가 나라사랑의 근본’이라고 주지시켰다. 남의는 당시 형의 뜻을 몰랐으나, 상해거사 후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광주학생의거로 새로운 의지 다져
그해 11월 3일, 가득이나 가슴이 북받치는 매헌의 마음을 분노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학생의거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통학열차를 이용하는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마찰에서 비롯됐다.
사건은 10월 30일 방과 후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 몇 명이 한국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으며 희롱한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박준채 등 광주고보생들이 일본 남학생들과 충돌, 급기야 열차 안의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서야 싸움이 멈췄는데, 우리 학생들만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한국 학생들은 11월 3일, 일본의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을 기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주일보사를 습격해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당시 광주일보사는 열차 내 사건을 일본학생들에게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보도했던 것이다. 이후 이 사건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참가학교가 194개교에 5만4천여 명의 학생이 운동에 동참하며 약 5개월간 운동이 지속되었다. 참아 왔던 한국 학생들의 한맺힌 울분이 폭발한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함흥에서는 일본인들이 한국인 3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매헌은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12월 6일자 일기에 쓰며,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학생 영기의 소원
학생의거로 시대가 어수선하다 보니 매헌에 대한 일경의 감시도 부쩍 강화되었다. 월진회를 비롯한 모든 조직을 해체하라는 압력도 거셌다. 이럴 때마다 매헌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결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평소처럼 야학을 진행하던 어느 날, 매헌은 학생들에게 “너희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다수 학생들의 대답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매헌을 실망시켰다. 그나마 나은 대답이 “선생님처럼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백영기(白英基)가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제 손으로 왜놈 한 놈을 때려죽이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야학당은 영기의 대답에 침묵이 흘렀다. 그제서야 매헌은 대견스러운 영기를 바라보며, 새삼 가르친 보람을 느꼈다.
 

[윤봉길 의사가 1929년 음력 1월 1일부터 1년간 쓴 ‘기사년 일기’.]

[윤봉길 의사가 고향을 떠나면서 남긴 유묵 ‘장부출가생불환’. 1930년 3월 6일, 23세에 연로한 부모님과 부인, 어린 자식들과 이별하며 이 유묵을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원 유묵은 상해의거 직후 윤의사 고향 가택을 수색한 일경이 압수해 갔다. 위 유묵은 1972년 가족의 고증을 거쳐 윤의사 친필자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복원한 것이다.]

마침내 결단의 순간이 오다
1930년 해가 바뀌자 이흑룡이 시량리에 왔다, 매헌은 내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헌은 진지하게 이흑룡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농민운동을 해왔던 자신이 과연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 의문에 대한 이흑룡의 진솔한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매헌의 이런 질문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매헌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매헌의 생각을 확인한 이흑룡은 “윤 동지, 더 말할 필요가 있겠소. 암울한 조국은 윤 동지를 애타게 필요로 하오. 농민운동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독립을 이룰 수 없소. 윤 동지에겐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만주로 갑시다. 윤 동지!”
매헌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남인 내가 부모형제, 처자식을 떠나면 누가 돌볼 것인가. 그동안 해온 야학과 농민운동, 월진회는 누가 이끌어 갈 것인가…’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더 이상 결심을 미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침내 매헌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동지. 우리 만주로 갑시다. 이 땅을 떠나 조국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봅시다!”
고대하던 답을 들은 이흑룡은 ‘3월 8일 오후 2시 신의주역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곤 매헌의 집을 떠났다. 이흑룡이 떠난 후 매헌은 이런저런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청도에서 모자 쓰고 양복을 입은 윤봉길 의사. ]


망명을 위한 준비
떠나기로 결심을 굳히자 매헌의 마음은 망명을 위한 준비로 바빠졌다. 일단 만주까지 갈 여비를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동안 농민운동에 매진하느라 그의 수중에는 한푼의 돈도 없었다. 고민 끝에 매헌은 아버지께 부탁하기로 했다.
어느 날 매헌은 아버지가 계신 방을 찾았다. 당시 여동생 순례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여동생 결혼 비용을 핑계 삼아 앞산을 팔자고 아버지께 넌지시 청을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선친께서 물려주신 산을 팔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매헌은 난감했으나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나왔다.
그때 문득 매헌의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공금 월진회비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대쪽 같은 매헌의 성격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에게 돈을 차용하자니,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자신의 심중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매헌은 월진회비를 쓰기로 마음을 다졌다. ‘다만 반드시 갚되, 귀한 일에 쓴 것을 알면 모두들 이해해 줄 것이다. 이 돈은 우리 독립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자금 문제는 이렇게 마무리 짓고, 이제 본격적으로 떠날 준비를 하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되새기며 위안을 삼았다.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검문당하는 한인들. 일제 국경 감시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동하는 한인들을 검문하여 독립운동 세력과 교류하는지 감시했다.]


매헌의 이런 약속은 훗날 지켜졌다. 당시 월진회 회원이었던 이한규(李漢奎)의 증언에 의하면 “부락에서 1원씩 60명이 내서 모은 60원을 가지고 타관에 나간 그분이 청도에선가 그 돈을 그대로 돌려 보냈어유....” 이렇듯 매헌은 타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도 사람이 지켜야 할 본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매헌은 야학생들 앞에서 마음속에 담긴 이별을 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러분, 이 야학과 월진회는 이 매헌 개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가꾸고 일군 이 소중한 성과들을 끝끝내 보존하고 발전시킵시다.” 많은 세월 이들과 함께 한 매헌으로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호소였지만, 이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학생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떠날 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매헌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잠들어 있는 아내 배용순과 어린 아들 종을 바라보며 ‘내가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내와 자식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이 메어져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한편, 매헌은 이런 생각이 들수록 마음을 다잡으며, 결심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이흑룡과 약속한 날짜는 쏜살 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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