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본거지 상해에 도착
1931년 5월 8일 마침내 상해에 도착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상해에 왔으나, 누구 하나 반갑게 맞아주는 이 없는 외톨이 신세였다. <자서약력>에 매헌은 “나를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으나, 목적지에 온 것만으로도 무상 기뻤다.”고 상해 도착 당시의 감정을 남겼다.
상해는 아시아 최대의 항구도시며,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답게 많은 건물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항구도시는 강대국 침략의 첫 번째 점령지로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조계(租界)가 형성되어 있다. 이 조계는 중국 침략의 전초지로써 외국 정부가 통치해 중국 정부의 힘은 거의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상해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동조계와 프랑스조계로 나뉘었다. 조계 안에는 정보가 많고, 일제의 감시도 덜해 자연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매헌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조계에 있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사무소를 찾아갔다. 대한교민단은 1919년 상해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만든 ‘교민친목회’에 뿌리를 둔 자치기관으로 1920년 임시정부 산하기구가 되었고 그 산하에는 일종의 경찰조직인 의경대를 운영하였다. 백범 김구는 외출 중이라 못 만나고, 직원 김동우(金東宇)와 마침 그곳에 와 있던 교포 안명진(安明鎭)과 인사를 나눴다. 매헌은 대한교민단에서 만난 안명진의 집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했다. 안명진은 프랑스조계 하비로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당시 교민단과 임시정부의 사무실이 같았기 때문에 교포사회에서는 교만단이 곧 임시정부처럼 인식되고 이었다. 임정은 1931년 12월 28일에 교민단 규칙을 개정하여 단장제를 위원제로 바꾸었다. 1932년 1월에는 정무위원장(단장)에 이유필, 정무위원으로는 김구, 김철을 선출했다. 실질적으로 교민사회를 이끄는 곳은 교민단이었다. 임정은 지방색 다툼, 투쟁노선 갈등, 자금난 등으로 겨우 이름만 유지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곳이 이런 상황이다 보니, 중국인은 물론 장개석(藏介石) 총통도 임정을 우습게 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던 매헌은 유명무실한 임정의 초라한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일단 매헌은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헌은 한국독립당 총무이사인 춘산(春山) 이유필(李裕弼) 선생을 만났다. 매헌은 목바리에서 해온 야학과 부흥원, 월진회 등 상해까지 오게 된 행적에 대해 진솔하게 설명하며, 조국독립에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이유필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매헌은 이유필 선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와 세상 돌아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매헌은 이유필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이 무렵부터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晤), 김현구(金玄九), 김의한(金毅漢), 김두봉(金枓奉), 박창세(朴昌世)와 교류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이런 연유로 매헌은 <자서이력>에 자신의 상해 시절 활동은 이분들이 잘 알 것이라고 썼다.
상해에 도착해 1개월여 인삼 등 행상을 하다가 매헌은 안명진의 주선으로 교포인 정안립(鄭安立)과 동업으로 모자공장 ‘미리공사’를 개업했다. 그런데 개업 직후인 7월초 만보산사건이 발발해, 중국인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되는 바람에 모자가 팔리지 않아 자금난에 봉착했다. 결국 모자공장을 교포사업가 박진(朴震)과 중국인이 공동운영하는 중국종품공사(中國鬃品公司)에 넘기고 그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후일 도모하며 영어공부에 몰두
중국종품공사 직공이 되자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되었다. 이 무렵 매헌은 상해로 온 자신이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1930년 전후의 임정은 고용인 급료 20원과 사무실 월세 30원을 지불하지 못해 집주인으로부터 피소당하고, 소유하고 있던 권총 네 자루 중 두 자루를 팔아 운영비로 쓸 만큼 재정이 궁핍했다. 임정 존립 자체가 위태한 상황으로 겨우 이름만 유지했다.
이러다 보니 당시 백범 김구는 동포의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를 돌봐주고 끼니를 해결하며, 잠은 동지들의 집이나 창기의 집을 옮겨 다니며 자는 등 동가숙 서가식했다. 그 무렵 임정은 김구의 표현처럼 ‘활동이 없는 상태’로 정부라는 이름만 그저 유지되는 말기적 형태였다. 한마디로 임정을 믿고 그 어떤 일도 도모키 어려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만보산사건으로 중국인의 협조도 난망(難望)한 상태였기에 뜻을 펼칠 방법이 없었다.
도저히 혁명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매헌은 세계혁명사를 공부하려고 도미(渡美) 계획을 결심했다. 이때부터 매헌은 낮에는 모자공장에서 일을 하며, 저녁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며 미국유학 준비를 했다.
한편, 공장의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자 매헌은 한인 동료들을 계몽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한인 공우 17명과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했다. 회장을 맡은 매헌은 한인 공우들의 권익보호와 친목 도모에 힘쓰며 바쁘게 지냈다. 이처럼 매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의(不義)와 맞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앞장서며, 한시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1931년 7월 2일 만주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조선 농민들은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서 사정했다. 당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일본 관청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중국인들에게 반한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좋은 기회라 여겨 간계(奸計)를 꾸몄다.
일본 영사관은 경찰들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도와주는 척, 일단 물길을 내는 공사를 마무리 짓게 하였다. 일본 경찰의 힘에 눌려 중국인들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농민들이 중국인들에 의해 엄청난 손해와 함께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는 가짜 정보를 흘려 국내 신문에 기사화되었다.
이에 분노한 우리 국민들로 인해 국내에 있는 화교 109명이 살해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위협을 느낀 화교 6천여 명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만주의 중국인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을 습격해 여러 명이 죽었다. 날이 갈수록 중국 내에서 반한 감정과 조선인에 대한 불신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일본의 계략은 성공적이었고, 얼마 후 이를 빌미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중국인의 협조 없이는 안 되는데, 중국인들은 조선인들만 보면 싸우려 하며 상황은 점점 어렵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음모였다는 것을 안 매헌은 일제의 간교함과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행동에 치를 떨었다.
당시 매헌의 심정이 담긴 한시
임리통음한성월(淋漓痛飮漢城月) 일찍이 서울의 달빛 아래 흠뻑 술에 취했는데
강개비가호시추(慷慨悲歌滬市秋) 지금 상해의 가을 아래 울분에 젖어 슬픈 노래를 부르네
이 한시(漢詩)는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실린 것을 필자가 발굴, 국내 언론에 소개해 조선일보에 기사화되었다. 다음의 글은 기사를 간추린 것이다.
1931년 상해시절 매헌이 일본의 침략 아래 놓인 한․중 양국의 암담한 현실을 읊은 한시이다. 이 한시는 중국공산당 상해시위(市委) 당사자료수집위원회가 홍구공원 의거 직후 상해에서 발행된 신문 ‘대만보’(大晩報) 기사를 인용하여 1989년 펴낸 <상해인민혁명사화책>(上海人民革命史畵冊)에 수록된 칠언 절구(또는 칠언 율시)의 두 구절이다.
매헌의 출신 배경과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의거에 대한 중국 언론들의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 준다.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서 소개한 혁명가 중 외국인은 윤 의사가 유일하기 때문에 장개석뿐 아니라 중국공산당도 상하이 의거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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