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상봉] "헤어질땐 6살이었는데…어떻게 살아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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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공동취재단·박은주 기자
입력 2018-08-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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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차 이산가족상봉’ 2회차 상봉 둘째날인 지난 2015년 10월 25일 금강산에서는 오전 개별상봉과 공동중식,단체상봉이 이어졌다.금강산호텔에서 이산가족들이 공동중식을 하는 장면을 북한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서울로 유학 갔던 중학생 장남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돼서, 이제는 눈가에 주름이 잡힌 두 동생과 60여 년 만에 상봉한다. 

3남 2녀 가운데 장남인 박기동 할아버지(82)는 오는 20일 금강산에서 3박 4일간 북쪽에 남아있는 셋째 여동생인 박선분 씨(73), 막내 남동생 박혁동 씨(68)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이번에 만나게 될 동생들이 헤어질 당시엔 6살, 2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사실 이름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불과 중학생의 나이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그는 아직도 고향의 모습이 눈에 선한 모습이다.

박 할아버지는 "어릴 때 부모님이 소유했던 논이 2만평, 밭이 6000평으로 그것이 생활 근거였는데, 그 동네에서 그대로 살았는지 딴데로 이주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북쪽에 남은 형제들에 대해 박 할아버지에게 제공된 정보는 그들의 생존 사실과 나이 외에는 없다.

박 할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줄 선물로 옛날 사진들과 여러가지 물품들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는 "딸과 막내 아들이 와서 이것저것 잔뜩 사다 놨는데, 못 갖고 가는 물품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갖고 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적집자에서 안내문을 보낸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황해도 연백군이 박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박 할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연백군은 22개면이 있을 정도로 큰 지역이었는데, 군 전체에서 서울의 중학교에 합격하는 사람이 한 두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공부를 잘 했던 그는 서울로 유학을 와, 당시 보인상고를 다니던 6살 연상의 삼촌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당시 북쪽 고향에 머무르던 부모님과 셋째 여동생인 박선분 씨, 막내 남동생 박혁동 씨와는 이때부터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형제인 둘째 남동생 박승봉 씨와 넷째 여동생 박선녀 씨는 전쟁 이후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피란민 수용소에서 재회했다. 

이에 부모님과 2남매는 북쪽에, 3남매는 남쪽에 영영 떨어져 살게 됐다. 

박 할아버지는 두 동생과 함께 북쪽에 거주했던 부모님과의 상봉도 원했으나, 두 분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쟁 발발 이후 박 할아버지는 미군 극동사령부 산하 게릴라 부대인 '8240부대'(켈로 부대)에서 활동해 국가 유공자가 됐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징집 연령이 됐을때 다시 해병대로 징집돼 3년간 근무를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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