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할 책임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떠넘겼다.
언뜻 시 주석이 궁지에 몰린 듯 보이지만 미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 연출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역전쟁과 관련해 대미 항전 의지를 굳힌 만큼 미·중 갈등 완화를 위해 정치적 지도력과 북·중 관계를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中, 트럼프 '중국 책임론'에 발끈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26일 사평을 통해 "최근 북·미 협상이 계속 지연되는 것은 미국의 책임"이라며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미군 유해 송환 등으로 성의를 보였지만 미국은 계속 위협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4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 계획을 취소하면서 '중국 책임론'을 거론한 데 대한 맞대응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중국이 북한을 무역 협상의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것 아니냐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관계가 해결된 이후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환구시보는 "백악관이 훌륭한 변명거리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라며 "무역전쟁과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엮는 것은 미국 내 여론을 잠재우고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중국 외교부도 발끈했다. 외교부는 전날 루캉(陸康) 대변인이 취재진과 문답을 나눈 내용을 공개하며 "미국의 주장은 사실에 위배되고 무책임한 것"이라며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안정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반박했다.
중국 측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 주석이 예기치 않은 난관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시 주석이 북한의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다음달 9일을 전후로 방북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 들어 세 차례나 중국을 찾았던 만큼 시 주석의 연내 답방이 무리한 일은 아니다.
북한과 손잡고 대미 압박에 나설 심산이었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승부수에 되치기를 당한 형국이 됐다.
시 주석이 정치적 부담을 떠안으며 방북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급을 대신 보내는 등의 대안도 거론된다.
◆'시진핑 체제' 건재 과시
다만 중국 전·현직 수뇌부가 국가 전략을 논의하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가 끝난 뒤 시 주석이 보인 행보를 감안하면 미국의 압박에 강경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중국 최고지도부는 무역전쟁과 관련해 대미 항전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를 감축하는 정도로 양국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 베이징 소식통은 "베이다이허 회의를 거치며 대미 대응 전략의 큰 그림을 완성했을 것"이라며 "한 번 물러서면 양보를 거듭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고 전했다.
시 주석을 정점으로 하는 공산당 영도 체제를 공고히 다지면서 장기전에 대비하기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시 주석은 지난 24일 중앙 의법치국(依法治國·법치주의)위원회가 연 첫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지난 3월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이후 신설된 조직이다.
시 주석은 "법치에 대한 당의 집중·통일 영도는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건설하고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며 전 인민이 따를 수 있게 지도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특히 '시진핑 사상'이 삽입되고 연임 제한 규정이 철폐된 새 헌법의 철저한 집행을 주문했다. 이날 회의에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리잔수(栗戰書)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권력 서열 2~3위가 나란히 배석했다.
또 무역전쟁 책임론이 제기된 왕후닝(王滬寧)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도 참석해 시 주석 체제가 균열 없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렸다.
앞서 시 주석은 대외 선전과 여론 통제를 담당하는 책임자에 측근을 기용하고,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서 '절대 충성'을 강조하는 등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또 다른 베이징 소식통은 "각종 설이 난무하지만 시 주석의 1인 체제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징후는 발견할 수 없다"며 "미·중 갈등 완화를 대가로 지도력에 흠집이 날 만한 정치적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