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로 조국광복의 길은 앞당겨졌지만 목바리 그의 생가는 일제로 인해 초토화가 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목바리
상해의거 다음날인 1932년 4월 30일 새벽, 충남 예산 윤봉길 의사의 집은 일경(日警)이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하는 바람에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었다. 일경은 아버지 윤황을 비롯한 식구들을 마당에 꿇어앉히고 엄중 문책(問責)을 하며 단서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 의사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우리 봉길은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했다.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일경들에게 호통을 칠 정도로 의연했다. 이후 김원상 여사는 “봉길은 의거일에 대한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며, 윤 의사의 생일을 4월 29일 의거한 날에 맞춰 생일상을 차리며 해방될 때까지 13년간 일제에 항거했다.
이날 이후 일경은 윤 의사 집 옆에 초소를 세우고, ‘조선에서 제일 나쁜 역적의 집’이란 낙인을 찍고,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주도면밀하게 감시했다. 이런 일경이 두려워 마을사람들은 우연히 마주친 윤 의사 가족과 인사를 나누려면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볼 정도였고, 심지어 윤 의사의 집을 피해 다녔다.
순국 직후, 목바리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 소식이 1932년 12월 21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보도됨으로써, 그의 집은 슬픔에 잠겼다.
상해의거 두 달 전, 매헌이 동생 남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사변은 확전될 것 같다. 이대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내용을 본 어머니는 “집은 걱정마라. 너의 길을 가라”라는 요지의 답신을 보낸 바 있다. 이런 담대한 김원상 여사도 실제 아들의 죽음 앞에선 슬픔에 싸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자식의 ‘죽음의 길’을 만류치 않을 정도로 의기(義氣)가 강했던 김원상 여사. 하지만 실제 자식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그녀 역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한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공명(共鳴)이 든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1949년 12월 환갑을 맞은 김원상 여사께 축시를 봉정(奉呈)했다. “…몸으로 고금(古今)에 없는 의(義)를 버티었으니, 김 부인의 수는 가장 갸륵도 해라. 듣자니 어머니의 범절이 아들을 잘 가르쳤다…”
한편 동생 남의는 아버지와 함께 형님의 유해 인도를 위해 백방으로 힘을 썼다. 일단 예산경찰서를 통해 일본 육군 제9사단에 유해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남의는 전웅수(田雄秀) 동지와 일본 가나자와시(金澤市)로 직접 가서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오려고, 극비로 일을 추진하다가 충남경찰부에 발각되어 가혹한 체형을 받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나중에 유해 대신 윤봉길 의사의 유품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늘 지니고 다니던 사각도장과 핏자국이 선명한 손수건, 가죽지갑, 안경집, 회중시계 그리고 약간의 중국 지폐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되자, 조국 광복의 물꼬를 튼 윤봉길 의사의 집은 하루아침에 ‘의사의 집’으로 각광(脚光)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던 유족들은. 민족이 해방되던 바로 그날, 광복의 감격을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느꼈다. 일제하에서 대역 죄인의 집으로 따돌림 받다가 ‘조국 광복을 앞당긴 의사의 집’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지방유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윤봉길 의사 및 집안의 공적(功績)을 치하했다.
어느 날 충남도지사가 찾아와서, 윤 의사 아버지 윤황에게 큰절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비록 배움은 없었으나 자랑스러운 파평 윤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비로 살고자 노력했던 ‘바지락당이’ 윤황의 소원이 풀린 것이다. ‘바지락당이’는 별 볼일 없는 농부가 선비행세를 한다고 마을사람들이 윤황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그런 윤황이 ‘조선 왕의 사자로부터 큰절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생각하니 그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백범 김구 선생의 환국
그해 11월 23일 김구 선생의 환국 소식을 들은 윤 의사 유족들은 가슴이 설렜다. 상해의거를 도모한 윤봉길 의사와 배후에서 거사를 도운 김구 선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同伴者)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김구 선생에게도 윤 의사에 대한 감회는 유가족 못지않았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위상(位相)에 정점(頂點)을 찍게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윤봉길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상해의거가 있고 나서 항주에서 처음으로 5월 15일 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열렸다.
상해의거가 임시정부의 활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위원들 사이에 내분(內紛)이 일어났다. 김구 혼자만이 모든 이로부터 추앙을 받는 천하의 영웅으로 등극했으나, 반면 다른 국무위원들은 신상에 위험만 닥쳤기 때문이었다. 논쟁 끝에 김구는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가흥으로 떠났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거사 동반자인 김구 선생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그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에 김구 선생은 신문에 윤봉길 의사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기사를 본 남의는 1945년 12월 2일 조카 종(淙), 유골봉환위원회 부위원장 김관룡(金寬龍)과 함께 김구 선생의 숙소인 죽첨장(竹添莊)을 찾아갔다. 윤봉길 의사의 동생과 아들을 본 김구 선생은 윤 의사를 만난 듯 뜨겁게 반겼다. 윤 의사의 뜨거운 애국심과 기백, 지난 일을 되새기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자리에서 남의는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덕산에서 조인원(趙仁元), 정인영(鄭寅英) 등 300여 명이 모여, ‘매헌윤봉길선생유골봉환위원회’를 발족했다’는 것을 전했다. 이에 유해봉환은 임정에서 추진하겠다는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임정에 위임했다.
백범,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하다
해가 바뀐 1946년 4월 26일, 김구 선생이 조성환, 안재홍, 권태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윤봉길 의사 유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려고 충남 예산에 왔다.
이날 예산군은 축제의 날이었다. 군민들은 국왕을 영접하듯 마음과 정성을 다해,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친 김구 선생을 환영했다. 도처에서 아녀자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산에서부터 덕산 윤봉길 의사 고택에 이르는 길에는 황토를 깔아 실제로 국왕의 예우를 했다.
김구 선생은 윤 의사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며, 아버지 윤황과 동생 남의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상해의거를 회고하며 장례절차를 협의했다.
다음날 아침, 윤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 앞 넓은 공터에서 ‘매헌윤봉길의사 상해의거 제14주년 기념식’ 연단이 차려졌다. 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행사로, 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구 선생은 “조국해방의 초석을 마련한…” 요지의 추도사를 하던 중 갑자기 연단에 엎드려 통곡했다. 윤봉길 의사와 헤어질 때, “후일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던 마지막 인사 장면과 그에 대한 고마운 감정 등등 지난 일이 세차게 북받쳐 올랐으리라….
한편, 이날 행사에 윤봉길 의사의 스승 매곡 성주록 선생도 참석했다. 성주록 선생은 식장 앞에 마련된 방명록에 ‘대동의열사(大東義烈士) 윤봉길, 동반인(同伴人) 매곡(梅谷)’이라고 서명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윤 의사 가족이 “선생님, 제자에게 쓰시는 글을 어찌 ‘스승’이 아닌 ‘동반인’이라 서명하십니까?” 여쭈었다. 그러자 매곡 선생은 “나와 윤봉길 의사는 함께 공부하던 사이 아닌가? 나 역시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네. 우리는 함께 배움의 길을 걸어온 게지. 그러니 동반인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겠나.”
구국(救國)의 일환인 야학 설립과 농촌부흥운동, 죽음으로써 조국광복에 헌신(獻身)한 윤봉길 의사. 백발이 성성한 스승 매곡은 25세의 제자 매헌을 자신의 동반인으로 각별히 예우한 것이었다. 이날은 구국(救國)의 영웅, 청년 의사 윤봉길이 후세(後世)에 길이 남을 역사적 거인(巨人)으로 추앙(推仰)받는 날이기도 했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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