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0월 4일. 국내 최초 유성영화 '춘향전'이 개봉됐다. 이명우 감독이 자신의 친형인 이필우 촬영기사와 함께 만든 이 영화는 당시 경성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다. 1등석에 앉으려면 1원을, 2등석은 70전을 내야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각각 12만원, 8만원에 달한다. 이렇게 높은 입장료에도 흥행은 폭발적이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단성사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문전성시를 이뤘다. 개봉 첫날에만 1500원이 넘는 수입을 거뒀고, 불과 2주 만에 8000원 규모의 제작비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은 철문을 여닫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에도 감탄했다. 이전에도 외국에서 제작된 유성영화가 몇 차례 소개된 적은 있지만, 스크린 속 배우들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올 때의 감동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하지만 영화 자체만을 놓고 보면 수작이라고 평가하긴 어려운 점도 있었다. 당시에도 완성도가 조악하다는 비평이 쏟아졌는데, 그도 그럴 만했던 것이 춘향전의 제작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거금 1200원을 들여 어렵게 일본에서 녹음 장치를 공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성영화를 만드는 노하우는 가져오지 못했다.
특히 제작진을 애먹인 것은 촬영 도중에 발생하는 잡음이었다. 방음 설비가 없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자동차 경적, 새벽 두부 장수의 목소리가 그대로 삽입되기 일쑤였다. 이들은 물에 축인 멍석 1만600여장을 벽에 붙여 간이 방음 장치를 만드는가 하면, 한밤중에 촬영하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제작을 마쳐야 했다. 불행히도 현재는 춘향전의 원본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혹독하고 잔인하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영사기사로 활약했던 알프레도가 어린 소년에게 던진 충고다. 알프레도의 말처럼 영화는 현실이 아니지만, 영화가 현실과 다르다는 이유 덕분에 식민지 조선의 대중은 영화로 울분을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에 태동한 한국 영화시장은 현재 세계 6위 규모까지 성장했다. 지난해에만 2억1987만명이 영화관을 다녀갔다. 오늘도 우리는 2시간 남짓의 영화 한 편으로 잠깐이나마 삶의 고단함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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