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므어이 동지(comrade)는 다양한 임무를 두루 역임하면서 당과 국가의 혁명적인 대의에 크게 기여했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베트남 개혁·개방의 상징으로 꼽히는 도므어이 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서거 소식을 알리면서 이같이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그가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농촌 인구 7500만명 중 80%가 빈곤층이던 베트남에서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도므어이 전 서기장은 1917년 하노이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응우옌주이꽁이지만 청년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에서 '도므어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됐다. '도므어이'는 '열번 승리했다', '열번 탈출했다'는 뜻이다. 프랑스 식민지 통치 시절인 1941년 독립운동 등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으면서도 탈출을 감행,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덕이다.
19세 때 독립운동을 시작한 도므어이 전 서기장은 1939년 공산당 당원이 된 뒤에도 베트남 내에서 활발하게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베트남 국부인 호찌민 전 주석이 프랑스 파리와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것과는 달리 국내파 1세대 혁명가로 꼽히는 이유다.
베트남이 독립한 후에는 상무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 부총리, 총리 등 주요 직위를 두루 거쳤다. 1991년 6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베트남 권력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1986년에는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Đổi Mới)'의 채택을 주도해 베트남 경제가 전환점을 맞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베트남의 덩샤오핑'으로 불리기도 한다.
독립 이후 비효율적인 유통 구조, 급격한 물가 상승률, 경제 성장 둔화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기존 중앙집중형 경제에서 '사회주의 중심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새롭게 바꾼다'는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외국인 투자법을 공포해 민간 기업 등 외국인 투자를 장려했다.
서기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외교 관계 정상화에도 힘을 쏟았다. 1991년과 1992년에는 중국, 한국과 각각 국교 정상화를 이뤘다. 1995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을 시작으로 국제기구에 잇따라 가입했다. 1995년에는 베트남전 이후 적대 관계로 남아 있던 미국과의 국교도 다시 수립했다.
1995년 한국을 공식 방문한 뒤 1996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경제 개혁에 있어 한국형 모델을 참고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생 동안 혁명과 혁신을 거듭했던 도므어이 전 서기장은 지난 1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군중앙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101세. 베트남 독립운동과 경제 개혁의 중심으로 통했던 도므어이 전 서기장의 장례 형식과 일정은 향후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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