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의 40년은 전반기 20년(1968년-1988년)과 후반기 20년(1988년-2008년)으로 정확하게 나뉘어집니다. 스무살까지의 생은 먹고 자는 일이 힘겨웠던 최악의 성장기로 이뤄져 있고, 마흔살까지의 생은 스무살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스타인생을 살었지만 결혼과 이혼의 롤러코스터와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면서 자아를 발견해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전반기에 겪었던 가장 큰 일은 아버지의 가출로 인한 가정파탄이었고, 후반기 그녀를 흔든 사건은 스스로가 꾸린 가정이 겪었던 풍파와 디지털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스타로서 감내해야 했던 역작용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특유의 주체성과 시대에 대한 감응력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장해나간 '보기 드문 스타'였죠.
전반기 최진실의 면모 중에서 두 가지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미술적 재능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화지와 크레용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그림을 그리곤 했죠. 중학교 때 미술대회에서 수상하는 일이 늘었고, 교사는 최진실의 재능을 살려야 한다고 어머니 정옥숙에게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최진실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미술학원에 다닌 건 어머니의 '자식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지독해지는 궁핍으로 스스로 미술 공부를 포기합니다. 부친의 사업 실패 이후 전업주부이던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상황에 이르러, 학교 졸업조차 숨찼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예계로 나가게 되는 건, 이런 벼랑 끝에서의 선택이었습니다. 최진실이 만약 화가가 됐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가만히 '화가 최진실'을 떠올려 봅니다.
후반기 스타로서의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많지만, 2005년 12월 4박5일 일정으로 히말라야 산맥 안나푸르나 산 남벽을 등반한 일은 특별히 이채롭게 느껴집니다.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37세 여성은 강단있게도 베이스캠프가 있는 4200m 고지까지 올라갔습니다. 최진실은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청계산을 오르며 기초체력을 다졌다고 합니다. 최진실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언론인 이석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최진실은 몸이 유난히 약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마친 뒤엔 반드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죠." 그녀의 히말라야 등산은 자기와의 싸움이기도 했을 겁니다.
안나푸르나 산을 오른 까닭은 백혈병 환자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은 KBS '장밋빛 인생'에 함께 출연했던 손현주가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최진실은 히말라야 등반 중에 조창인의 소설 '첫사랑'(2005년작)을 틈틈이 읽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이 소설은 히말라야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히말라야의 별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산에서 내려온 뒤 최진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춥고 고생스러워서 내가 왜 지금 이곳에 와서 기를 쓰고 올라가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런데 반 정도 올라가고 나니 이 정도 올라온 것이 아까워서 포기를 할 수 없더군요. 인생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히말라야의 웅장한 산을 가슴에 안고 나니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한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최진실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등산 중에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났어요. 포기하고 싶을 때는 마음 속으로 환희, 수민(2008년 준희로 개명)이를 생각하면서 걸었습니다. 환희, 수민이가 엄마를 정상에 오르게 했습니다."
히말라야에서 인생의 등락을 발견한 최진실. 하지만 3년 뒤 '험준한 내리막길'이 그만 그녀를 멈추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떠나간지 10년. 아이들이 자신이 있는 갑산공원에 와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엄마를 정상에 오르게 했던 그 아이들이...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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