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나의 목숨을 지탱하는 필수적인 물질들이 있다. 나는 손으로 외부의 물질을 입을 통해 몸 내부로 음식을 섭취한다. 그러나 인간은 최대 30일 정도 금식할 수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내 몸 자체의 내부 활동이 있다. 심장 박동과 호흡이다. 우리는 목숨을 매 순간 지탱해주는 이 신체의 활동들을 무시한다. 당연하고 흔하기 때문이다. 심장과 숨은 우리가 활동하든지 수면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심장은 하루에 10만번 정도 박동한다. 그러나 심장이 만일 1분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 인간은 곧 사망에 이른다. 인간은 하루에 2만3000번 대기 중에 있는 공기를 입과 코를 통해 호흡한다. 우리는 숨을 최대한 3분정도 참을 수 있다. 그 이상으로 숨을 쉬지 못한다면 바로 죽음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심장과 숨을 의식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가면 의사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청진기를 귀에 꽂고 심장박동수와 숨쉬기를 듣는다.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먼 거리로 차를 타고가 즐기지만, 정작 매 순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숨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자기보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다.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서양철학은 인간의 육체 연구가 아니라 마음 연구에 몰두해왔다. 사상가들은 몸이나 숨은 마음의 연장이거나 부속품쯤으로 여겼다. 18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에밀: 교육에 관하여'(1726년)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다는 것은 숨 쉬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기관들, 감각들, 지적인 사고들이 우리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음연구에만 몰두한 사상가들에 대해 19세기 독일 현대 철학자 니체(1844-1900)는 '즐거운 학문'(1882)이란 책에서 이렇게 신랄하게 표현한다. “이런 학자들의 책들은 항상 누구를 억압하거나 억압당하고 있다. 소위 ‘전공자’가 어디에선가 등장한다. 그는 열의에 차 있고 심각하며 분노한다. 그는 자신이 앉아 빙빙 도는 방구석을 과대평가한다. 모든 전공자들은 등이 굽어있다. 모든 학자들의 책은 자신의 왜곡된 영혼을 반영한다. 그의 작업은 왜곡이다.”
생명체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에 거주한 한 무명 유대인이 '창세기' 2장에 기록한 인간 창조의 과정만큼 세밀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과 생명체의 핵심을 ‘호흡’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아담’ 이라고 불렀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붉은 흙’이란 뜻이다. 그들은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을 마친 후에, 다시 땅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무명 저자는 인간 창조의 순간을 창세기 2장 7절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 하느님이 땅에서 떼어낸 먼지들로 아담을 빚어 만들었다. 그 신은 인간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랬더니, 그 인간이 ‘생명체’가 됐다.”
태초에 신이 먼지를 모아 구성된 흙을 빚어 만든 인간이란 모형을 만들었다. 그 모형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신은 그 모형의 코에 무엇인가를 불어넣었다. 저자는 그 무엇인가를 히브리어로 ‘니시매스 하임(nishmath hayyim)'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구절은 ‘숨’을 의미하는 ‘니시마’와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으로 구성됐다.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이란 히브리 단어는 복수형이다. 그러므로 ‘숨’ 하나하나는 매 순간 생명을 연장하는 도구다. 인간이 하루에 이만삼천번 숨을 쉬니, 그와 동일한 숫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숨과 숨 사이의 찰나가 인생이며, 이 셀 수 없는 찰나 또한 인생이다.
‘생명체’란 히브리어 표현은 ‘네페시 하야(nepesh hayyah)'다. ‘네페시’란 단어는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네페시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용어다. ‘하야’는 ‘살아 움직이는’이란 뜻이다. 이 글을 쓴 유대인 저자는 인간이 살아 숨 쉬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숨’이라 간파했다. 숨은 생명을 유지하는 실질적이면서도 총체적인 힘이다. 의식적인 숨쉬기는 자신이 지금 살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첩경이다. 요가수련에서 호흡에 관한 이해는 근본이다. 의식적이며 훈련된 호흡은 요가수련자의 온 몸을 열어, 호흡을 통해 전달되는 생명의 에너지를 신체 구석구석으로 전달한다. 의식적인 호흡은 수련의 몸의 균형을 잡아 척추를 곧게 세워 명상 상태로 인도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기원전 12세기 베다 시대로부터 의식적인 호흡인 ‘프라나(prāṇa)'를 인지했다. 프라나는 ‘호흡’이란 의미이지만 현대적인 의미로 산소를 들이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매 순간 삶을 지탱하는 ‘활력(活力)'이다.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호흡법은 요가수트라 II.49-51에서 ‘하타요가’란 명칭으로 자세히 소개될 것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4에서 요가수련의 중요한 과정으로 ‘호흡’의 방법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프라차르다나 비다라나 아브얌 바 프라나스야(pracchardana vidhāraṇa ābhyāṁ vā prāṇasya)." 이 문장의 번역은 이렇다. “혹은 요가수련의 목적은 날숨 전에 숨을 정지시키는 호흡 훈련으로 달성할 수 있다.” 이 문장에는 ‘혹은’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 ‘바(vā)' 가 들어있다. 요가수트라 I.34-39문장에는 모두 이 단어가 포함돼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이 접속사를 이용하여 여섯 가지를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호흡’으로 번역된 산스크리트 단어 ‘프라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명력, 활력, 에너지 생명의 원칙’ 등 다양하게 번역가능하다. ‘프라나’는 ‘숨쉬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안(an)'과 ‘앞으로 나가다’란 의미를 지닌 접두어 ‘프라(pra)'의 합성어다. 인간의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게 만드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안’이란 단어는 인간의 숨쉬기 행위를 그대로 옮긴 의성어에서 조성된 단어 같다. ‘안’을 시작하는 첫 음가인 ‘아’를 발음하기 위해서 먼저 숨을 들이마셔야 하고 그 두 번째 음가인 자음 ‘ㄴ’을 발음하기 위해서는 숨을 내쉬어야 한다. ‘안’은 들숨과 날숨을 표현한 의성어다.
프라나는 힌두철학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에너지를 지칭하는 용어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활력을 신장해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건강을 향상하기 위해 프라나를 이해하고 훈련해야한다. 프라나는 육체 안에서 ‘나디스(nadis)'라는 힘의 통로를 통해 이동한다. 몸 안에서는 수천개의 통로가 있다. 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세 가지다. ‘이다(ida)'는 척추의 왼편에 위치한 들이마시는 음의 통로, ‘핑글라(pingla)'는 척추의 오른편에 위치한 내쉬는 양의 통로, 그리고 ‘수슈마(sushuma)'는 척추 중앙에 위치하는 통로다.
호흡은 다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마시는 ‘프라카(praka)', 숨을 들이마신 후 그 상태를 유지하는 ‘아브얀타라 쿰바카(abhyantara kumbhaka)', 그런 후 숨을 내쉬는 ‘레차카(rechaka, exhal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내쉰 후 그 상태를 유지하는 ‘바흐야 쿰바카(bahya kumbhaka)'다. 파탄잘리는 이 네 단계 중 세 번째 ‘레차카’와 네 번째 ‘바흐야 쿰바카’를 다른 단어를 이용해 ‘날숨’을 ‘프라차르다나(pracchardana)' 로, 날숨 후 정지를 ‘비다라나(vidhāraṇa)'로 표현했다. ‘프라차르다나’는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해 수련을 방해하는 생각들을 과감하게(프라) 축출시키는(차르다) 행위다. 그런 후 ‘용감하게 (비)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위해 자신을 정렬시키는 (다라나) 훈련이다. 요가수련을 위한 훈련은 요가수련장이 아니라 매 순간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숨을 쉬는 이 찰나도 수련의 과정이다. 내가 숨을 내쉬는 행위는 내 생각 속에 남아 있어 수련을 방해하는 잡념을 쓸어내 보내는 과감한 행위이며, 날숨 후 잠시 정지하는 순간은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야 하는 고유한 임무를 상기하고 다지는 패기가 있는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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