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블록체인 산업을 위한 적절한 규제·진흥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사이에 암호화폐공개(ICO) 등으로 인한 경제적 과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업계는 블록체인과 그에 파생된 산업의 경제적 효과가 매우 크다며, 참여자들이 국내에서도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조속히 정책 방향을 정해주길 촉구하고 있다.
9일 블록체인업계에 따르면 한국은 ICO 불허 국가며, 암호화폐 거래소 관리 규정도 없는 상태다. 정부는 지난해 9월 모든 형태의 ICO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가 실시됐으나 은행에서 해킹과 자금세탁 등을 이유로 실명확인 계좌를 발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거래소에 대한 운영기준이나 보안 준수 규정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결과 블록체인 관련 글로벌 투자는 블록체인에 친화적인 국가로 넘어가고 있다.
소영술 KOTRA ICT성장산업실장은 “해외 벤처캐피털(VC)과 엔젤 투자자를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한국의 정책 당국이 (암호화폐 거래소, ICO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 등을 구체화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한다”며 “정책 당국의 입장이 불분명하다 보니 싱가포르나 스위스, 일본 등으로 투자처를 바꾸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병태 KAIST(한국과학기술원) IT경영학과 교수의 ‘블록체인 산업의 고용 파급효과 분석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ICO 국내 가치창출 지수’는 7.1로 조사 대상 47개 국가 중 가장 낮았다. ICO 국내 가치창출 지수는 이 교수가 개발한 지표로 해당 국가에서 진행된 ICO 모금액을 해당 국적의 기업가가 진행한 ICO 모금액으로 나눠 산출한다. 쉽게 말해, 기업가의 국적과 ICO 실행 국가가 일치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국내 기업의 ICO 모금액이 해외로 많이 빠져나간다는 의미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ICO 국외 유출 고위험국가’로, 실제로 국내 기업의 ICO 모금액 중 93%가 해외에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대만(19.6)이나 베트남(10.6), 필리핀(10.6) 등 같은 고위험국가에 속한 신흥국보다도 지수가 낮았다. 블록체인 기술에 우호적인 국가로 유명한 홍콩과 스위스, 싱가포르는 각각 237.8, 201.7, 153.9로 ‘ICO 국내 창출 국가’에 속했다.
이같이 ICO 모금액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이유 또한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ICO가 허용된 국가에선 수조원대의 자금이 모이고 있다. 글로벌 모바일 메신저 기업 텔레그램은 블록체인 플랫폼 개발을 위한 ICO를 지난 3월까지 진행, 총 17억 달러(약 1조9329억원)의 자금을 끌어모았다. 블록체인 솔루션 개발업체 블록원은 이오스(EOS) 프로젝트로 40억 달러(4조5480억원)을 모았다.
ICO는 단순히 자금이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술이 집약된 비즈니스 모델 등이 함께 제시된다. 특정 국가의 블록체인 생태계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이지헌 거번테크 이사는 “ICO와 같은 프로젝트엔 집약된 기술과 사업 모델 등이 담겼다”며 “나아가 이같은 프로젝트는 사회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고 있어 미래 사회상을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ICO 불허로 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제반 비용을 수반해 추가적인 국부 유출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ICO를 하려면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각종 수수료가 발생하고, 현지 법무법인에 막대한 자문료를 지불해야 한다. 수익이 나면 그 국가에 세금도 내야 한다. ICO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자사의 블록체인 기술을 현지에 공개해야 한다. 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
소영술 실장은 “우리 기업들은 현지에서 ICO를 할 경우, 그와 관련해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다”며 “한국은 블록체인과 그를 뒷받침하는 기술이 상당히 앞서가고 있음에도 정부의 정책이 불투명해서 산업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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