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 기 살리기에 나섰다. 일자리‧투자가 크게 위축되고, 민간소비마저 힘이 빠져 경기가 하향세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이는 개혁에 쏠려 있던 정부의 시선을 경제로 향하게 만들었다. 특히 J노믹스의 핵심 키워드인 일자리가 위태롭다. 결국 정부는 ‘일자리는 민간에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력적으로 달려오던 김상조호(號) 공정경제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면에 나서기 힘든 상황이 됐다. 내부적으로는 음지에 숨어 있던 공정위 출신의 대기업 재취업 문제가 드러나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스스로 꺼내기 껄끄러워졌다.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은 뚜껑이 열리자마자 재계와 시민단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며 입지가 좁아졌다.
그럼에도 공정경제 구축을 위한 그의 중장기 설계 작업에 거는 기대가 적잖은 것도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3년차를 앞두고 김상조 위원장은 임기 초반 주변의 기대보다 더 큰 무게를 짊어지게 됐다.
◆고용충격이 던진 한국경제 경고음··· “기업 기 살려라”
소득이 증가하면 일자리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는 정부 정책은 성과가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지난해 3%대 성장이 무색할 정도로 올들어 취업자 수는 고꾸라졌고, 실업자는 급증했다. 위축된 투자와 정체된 소비가 일자리를 틀어막으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일자리는 J노믹스의 핵심 키워드다.
고용쇼크에 공정위의 행보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됐다고 보긴 힘들다. 그렇지만 대기업에 두려움의 존재인 김상조 위원장과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교차되는 건 부담이다. ‘재벌개혁’을 선두에 세우긴 힘든 상황이 된 셈이다.
특히 대통령이 직접 대기업을 찾아 ‘일자리는 민간에서’라는 메시지를 던진 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대통령이 대기업 생산공장 현장을 찾아 총수를 만난 건 이번이 네 번째다.
문 대통령은 이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고 강조했다. 이례적으로 일자리위원회 회의도 이 자리에서 진행했다. 이를 두고 움츠러든 기업 ‘기 살리기’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부도 기업 기 살리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8일 경제부처 장관들을 불러 ‘경제현안 간담회’를 열고 일자리의 늘리기의 어려움을 우려했다.
정부는 시장과 기업에서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을 해소하는 등 시장‧기업의 기 살리기를 위한 정책 노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투자활성화를 위해 중앙‧지자체‧공기업 등 공공부문이 선도적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민간투자 확대를 위해 정책금융‧세제지원 같은 다각적인 유인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기름 끼얹은 공정위 재취업 문제··· 공정거래법 개편 영향 미칠까 ‘촉각’
공정위가 조직적으로 퇴직자의 대기업 재취업을 알선했다는 혐의로, 공정위는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꺼내기 힘든 처지가 됐다.
전(前) 위원장부터 부위원장, 과장급까지 전·현직 직원 12명이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2009년께부터 대기업에 고참‧고령 직원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방식으로 인사적체를 해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 역사상 처음으로 전 위원장‧부위원장이 동시에 구속됐다.
조직적 일탈에 대해 김상조 위원장은 머리를 숙였지만, 공정위에 대한 신뢰와 위상은 추락한 후였다. 내부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 취임 이후, 거침없이 진행되던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이 걸렸다는 게 아픈 점이다.
공정위는 최근 분위기가 38년 만에 개편작업에 착수한 공정거래법에 영향을 미칠지 촉각이 곤두서 있다.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은 정부안이 공개되자마자 재계와 시민단체 양측으로부터 곱지 않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양측을 모두 설득할 만한 수위로 맞추려다 되레 양측 모두를 불만족스럽게 만들었다.
김 위원장은 최근 열린 공청회에서 “공정거래법은 38년 만의 전면개편이자, 향후 30년간 우리나라 경쟁법 집행을 좌우할 중대한 작업”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공청회에서 재계는 우려를, 반대 측에선 제재수단의 강화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입장차만 재확인했다. 이런 입장차가 국회에서도 이어질 경우 개정안의 통과에 진통이 예상된다.
김 위원장은 취임 때부터 지속가능하고 예측가능한 재벌개혁을 강조해 왔다. 자신의 임기 동안에 완수한다고 공언하기보다, 3~5년 시계에서 일관되게 추진하겠다고 했다. 공정거래법 개편은 이 과정 중 하나로, 앞서 밝힌 단기·중기·장기 과제 중 ‘중기’에 해당한다.
◆‘재벌 저격수’의 등장··· 지나친 기대의 반사효과도
‘재벌 저격수’로 통하던 김상조 위원장의 강한 이미지는 수위 조절을 필요로 하는 경제정책에 양날의 검이 됐다.
교수 시절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올곧은 성품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길 바랐고, 반대편에선 충격을 우려했다. 김 위원장도 취임 이후 자신에 대한 상반된 비판과 평가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초반엔 이른바 ‘김상조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지난해 하반기 공정거래위원회에 접수된 민원‧신고 건수가 전년보다 50% 이상 급증했고, 가맹거래 서면실태조사 결과 가맹본부의 갑질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은 스스로 그간 대주주 지배력 유지‧확대 역할을 한 순환출자를 해소해 갔다. 한 치킨업체가 가격 인상을 철회한 것에도 ‘김상조 효과’가 붙었다.
지난해 공정위의 고발 조치는 전년보다 17.5%, 과징금 부과 건수는 34% 증가했지만, 경고와 자진시정은 각각 26.4%, 21.5% 줄었다. 간혹 돌출발언으로 시장이 출렁이거나 부처 간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그러나 김상조 효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재벌개혁에 대한 기대감보다 재계를 옥죈다는 우려를 더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기업을 엎드리게 만드는 모습이 연출되자, 우리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피어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큰 기대감을 품었던 쪽에선 김 위원장에게 ‘말랑말랑해졌다’고 평가한다. 그가 말한 ‘상반된 평가’가 현실화된 셈이다.
한 경제학자는 “(이번 정부 들어)재벌개혁 추진이 주춤해진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건 공정경제의 기반을 얼마나 탄탄하게,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마련해 놓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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