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규 칼럼] 난세에 처하여 시대의 명신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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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입력 2018-11-0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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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 가면 천년학부(千年學府)로 불리는 호남대학교가 있다. 이 호남대학교는 호남사범학교의 후신으로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마오쩌둥(毛澤東)이 나온 학교다. 전면의 마오쩌둥의 커다란 동상 뒤편에 악록서원(嶽麓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 4대서원의 하나인 악록서원은 남송의 주희(朱熹·1130-1200)와 장식(張栻)이 직접 강의와 강연을 하였으며, 호상학파(湖湘學派)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명말(明末)부터 왕부지(王夫之), 위원(魏源), 증국번(曾國藩), 좌종당(左宗棠) 등 당대의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악록서원에서 수학한 뒤 출사하여 중국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서원은 유학(儒學)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도 발달하였다. 허나 중국과 우리의 서원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서원이 정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는 관학(官學)의 성격이 강한 반면 우리는 자치권을 강력히 유지한 사학(私學)이었다. 중국은 철저하게 과거시험의 준비 장(場) 이자 강학(講學)을 주로 하는 학술터전이었다.

반대로 한국은 가문의 어른이나 스승을 모시기 위해 세웠던 문중(門中)서원을 기반으로 시작됐다.

12세기에는 저명한 유학자인 장식이 악록서원에 와서 집무했다. 1167년 성리학의 태두인 주희가 악록서원을 찾아왔다. 주희는 장식과 치열한 학술 토론을 벌였고 서생들에게 강학하였다. 그 일 이후 악록서원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다.

중국 근대 역사 인물 중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영웅 증국번(曾國藩·1811-1872)은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난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선비였다.

그런 그가 훗날 높은 관직에 오르고, 30만 대군을 지휘하고, 천하의 수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태평천국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던 기초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악록서원에서 유생시절 갈고 닦은 유가사상의 기본인 참된 마음의 열정, ‘혈성(血誠·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었다.

혈성을 다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사실 그는 그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다. 그 자신의 혈성은 유가(儒家) 덕목에서 시작된 가르침으로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위한 기본조건이다.

청나라 조정에 모든 혈성을 바치는 것, 그리하여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고, 일련의 개혁조치를 통해 청나라 조정의 지배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가문 배경이나 인맥이 아무것도 없는 한낱 선비가 스물일곱에 진사(進士)에 합격해서 서른일곱 살에 이품(二品)까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청나라 조정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 조정에 한없이 감사했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힘썼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청나라의 운명을 50여 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증국번의 공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초 증국번의 부장들은 안경 탈환 후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한 적이 있었다. 함풍 11년 ‘신유정변’ 당시 서태후가 상군(湘軍)과 관계가 밀접한 숙순을 처형하자 상군의 장수들은 모두 장차 화가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증국번이 자립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서태후가 정권을 다투면서 인심을 잃은 기회를 틈타 황위를 보위 한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켜 강산 즉 천하를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국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봉서신을 받은 증국번은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 서신을 꾸겨 입에 밀어 넣었다 한다.

만청4대명신 (증국번·좌종당·이홍장·장지동) 중 으뜸으로 알려진 증국번, 그의 상용(湘勇)·상군(湘軍)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려는 열정과 동향이라는 지연적 결합 및 안정된 급여 등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후에 그의 장수들은 자신의 무력을 기반으로 군벌(軍閥)로 발전하였다.

그는 평생 유가의 가르침에 충실했기 때문에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향해 혈성을 다할 수 있었다.

증국번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서 마오쩌둥에게까지 이어졌다. 마오쩌둥 역시 증국번의 저서인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에서 큰 감동을 얻었다고 수차례 언급하고 있고, 일부 내용을 직접 자신의 <강당록(講堂錄)>에 인용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어떻든 마오쩌둥은 주변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뜻을 지킨 덕분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하겠다.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 대부분은 부귀와 거리가 멀었고, 주자(朱子)도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은 수천년을 뛰어넘어 증국번에게도 이어졌다 하겠다.

우리 인간은 시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따라서 결국 시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서고금의 위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시대의 흐름에 따랐기 때문이다.

천하의 대세를 따르는 자만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 하겠다.

동아시아센터 회장 윤 창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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