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자르기’가 성공하려면 세간의 관심이 잘려나간 꼬리에 집중돼야 한다. 몸통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구체적 실체 하나를 미끼로 여론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게 꼬리 자르기 전략이다.
몸통은 여전히 커튼 뒤에서 실루엣만 보여야 한다. 좀더 치밀하다면 몸통과 꼬리간 윈윈이 되는 딜이 사전에 성사됐어야 한다. 몸통은 전체의 안위를 먼저 챙기고 훗날 희생양이 된 꼬리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앙심을 품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
KT 아현국사 화재 관련,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의 꼬리 자르기는 이런 관점에서 실패다.
이날 발표 중 주목할 점은 등급조정에 관한 사안이다. 과기부는 화재발생 직후 11월27일 태스크포스(TF)를 구성, 전국 915개 통신 시설 실태를 조사했다. 그 중 13개소의 등급조정이 필요하다고 결론 냈다. 아현지국은 그 중 하나다. 주변 지국과 여러차례 통합돼 C등급으로 상향됐어야 하나 KT가 이를 누락했다는 것이다.
전날 밤 노웅래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 긴급히 보도자료를 냈다. ‘KT의 아현지국 C등급 불법누락, 황창규 회장 사퇴해야’란 내용이골자다.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면 ‘KT가 아현지국 관리등급 상향을 불법 누락했다’ ‘이에따라 정부는 통신망 안전성 강화대책과, 등급 조정안을 발표한다’가 된다.
정부와 여당 소속 과방위원장이 사전에 각본을 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회의원실에서 정부 자료를 토대로 한 보도자료가 밤 8시10분에 갑자기 배포된 것은 보통 있는 일은 아니다. 다음날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 일정은 오래전 정해진 것이었다. 시간상 노웅래 의원실 자료가 이에 맞춰 긴급히 나온 셈이다.
정부가 KT가 아현지국 관리등급을 불법 누락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도 이보다 훨씬 전이다. 과기부는 이미 12월5일 KT에 불법사실을 고지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의원실 자료가 밤에 긴급히 배포된 것은 특정 목적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다.
어쨌든 세간의 시선은 KT의 불법 누락에 쏠렸다. 사후약방문 성격의 27일 대책이 시의적절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결정적 실수는 국민 모두가 몸통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등급을 나누고 점검하는 실행주체는 통신사들이지만, 통신지국 안전점검 시스템의 정점엔 과기부가 있다.
장석영 과기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이 지난 27일 관리 강화대책을 발표하면서 “이번 일(아현지국 화재사건)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반성했다”고 한 것도 관리·감독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점을 자인한 것이다.
하지만 과기부 어느 누구도 이번 일에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KT가 등급을 불법 누락했고, 시정명령에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게 정부 대책의 사실상 전부다. 뼈가 저리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몸통과 꼬리간 윈윈이 되는 딜이 성사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황창규 회장이 정부·여당으로부터 희생양이 된 대가로 받을 게 마땅치 않다. 황 회장은 박근혜 정부 때 선임돼 최순실 사태 연루 등의 의혹을 받았다. 노웅래 위원장은 “황창규 회장 퇴진하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엉성한 꼬리 자르기는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 유영민 과기부 장관은 화재발생 이틀째인 11월26일 황창규 회장 등 통신3사 수장을 긴급 소집하면서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몸통임을 세상에 알렸다. 가위질을 당한 황창규 회장은 꼬리 역할을 하면서 아무 것도 얻은 게 없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유인이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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