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뛰어넘는 신년사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집권 이래 처음으로 신년사에서 '비핵화' 단어를 꺼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미국과 국제사회에 재확인한 셈이다.
지난해 말까지 교착 국면에 빠졌던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도 청신호를 보냈다. 이에 따라 한·미와 국제사회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승부수로 단 한 번도 가보지 않던 길을 가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면서도 미국 등의 일방적인 강요 때는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고 압박했다. '플랜B'도 처음 언급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기해년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각국의 수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비핵화도 플랜B도 처음 언급
1일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비핵화 의지 천명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의사 △평화 체제 전환을 위한 다자 협상 제안 △북한의 자력갱생 강조 등 네 가지로 요약된다.
핵심은 역시 '비핵화'다.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대화 국면을 이어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이와 관련해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밝힌 것으로,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주목할 대목은 북한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언급한 점이다. 김 위원장은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상의 '비핵화 전제조건'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성공단 재개 등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전면적인 대북제재 완화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중단은 '사업자금의 핵 개발 전용' 등을 이유로 우리 정부가 먼저 중단했다. '김정은 신년사'가 문재인 정부를 비롯해 국제사회에 '큰 과제를 안겼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을 오판하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날 아주경제와 통화에서 "비핵화와 체제 보장을 빅딜하는 최상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다자협상 고차방정식…北, 경제개혁 시사
문제는 미국이 북한이 요구하는 정도의 상응 조치를 할 수 있느냐다. 김 위원장의 '플랜 B' 언급은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전 미국이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해까지의 미국 측 상응조치가 성에 차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북철도 착공의 순항을 위해서도 '대북제재 면제'는 필수다.
외교가 일각에서 김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을 '대미 압박용'으로 분석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다. 경우에 따라 김 위원장이 제안한 비핵화를 위한 다자협상이 고차방정식으로 흐를 수도 있다. 다만 지난해 신년사와는 달리 '핵탄두·탄도로켓의 대량생산' 등의 과격한 표현은 없어 김 위원장이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은 작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신년사의 상당 부분을 자력갱생 등 '대내 메시지'에도 할애했다.
핵심은 경제 분야의 '개혁조치'와 '기업체 경영 활동'이다. 김 위원장은 "내각과 국가경제지도기관들은 사회주의 경제법칙에 맞게 계획화와 가격사업, 재정 및 금융관리를 개선하며 경제적 공간들이 기업체들이 생산 활성화와 확대재생산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대북제재가 상존한 상황에서 경제 시스템 전환 없이는 자력갱생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부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경제사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기구체계와 사업체계 재정비를 역설한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이에 따라 기해년 초부터 북한의 경제개혁을 위한 후속조치가 단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부패와의 전쟁'도 선포했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부정부패가 '당과 대중의 혼연일체를 파괴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대내 장악력을 높여 '김정은식 체제'를 한층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30분간 진행된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1만3000여자 분량으로, 이 중 대내정책은 약 66%(약 8만6000자)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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