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을 지배하였던 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조선시대의 집권층들은 성리학적인 질서를 강조하며 이(理)와 기(氣) 라는 매우 경직된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묘 자리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제사의 형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의 예법과, 현실과는 동떨어진 명분의 문제는 당파싸움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집권층들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의 질서를 만들었고 이후 선비들이었던 지배층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부정하고 봉건사회를 수호함으로 급기야 우리나라가 주변강국들의 싸움터가 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되는데 큰 원인 제공자들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잠시 성리학에 반발하는 새로운 사상이 발현하는데 바로 실학사상이다. 실학은 실사구시학문의 약칭으로 학문의 연구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실과는 무관한 공허한 명분과 이론만을 제시하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실증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사상이다. 백성들의 실생활에 입각한 개혁안을 마련하고,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낮은 계급이었던 상공업 계층의 요구를 반영 하여 주는 등 민생경제를 챙기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정약용은 그 당시 먹고사는 문제의 가장 큰 산업이었던 농업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농민 안정을 위해 토지를 공동 소유하여 수확한 만큼 나누어 갖는 전론(田論)을 주장 하였으며,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 하면서 교통운수 시설의 확충, 광산 및 산림 자원 개발 등을 역설 하면서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화폐 개혁까지도 주장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적인 주장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들에 의하여 버려지고 말았고 이후 조선은 소모적인 논쟁과 명분 싸움으로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IT를 연구하는 공학자로서 견해이고 인문학을 하시는 학자 분 들은 다르게 해석 할 수는 있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현실 문제에 기반 하지 않은 논쟁과 명분 싸움들은 결코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하며 그 피해는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과학기술의 혁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혁신들은 산업의 급격한 변화를 이끌고 있으며 글로벌 경제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다행히 조선시대에 시기를 놓쳤던 실사구시의 사상을 우리는 극적으로 70, 80년대 산업 근대화의 시기에 적극 받아 들이 면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여러 산업들을 일으키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일구어 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일으키기 위하여 우수한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하였던 그 당시에는 해외의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우대 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아져서 필자가 중고교를 다닐 때만 하여도 많은 아이들의 꿈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던 걸 기억한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의 산업적인 성공을 일구어서 그런 것인지, 어느덧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체감한다. 대학에서의 이공대 진학하는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하신다. 그것만이 아니다, 좀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이공대 학생들 중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 보다는 그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고 감시하는 공무원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교육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사농공상의 분위기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닌 가 우려가 된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산업화의 성공에 취해 있는 동안 중국의 약진이 눈에 뜨인다. 중국은 “과학교육부흥국” 이란 기치 하에 과학기술 진보 및 혁신을 통한 경제 성장, 사회 발전, 국민의 삶 개선 및 국가 경쟁력 향상을 끊임없이 해 오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 중시 사상 덕에 대학에 우수한 인재들이 몰릴 수 있게 되었고 해외의 우수한 중국인 과학기술자들이 속속 본국으로 영입되면서 중국의 산업을 모방 중심의 조잡한 공산품 중심에서 알리바바, 텐센트와 같은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들을 만들어 냈고 최근에는 드론이나 핀테크와 같은 산업에서는 미국에서도 부러워할 정도의 기업들이 속속 등장 하고 있다. IT 분야에서 보면 십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의 논문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 되었는데 요즈음 중국의 주요 대학 교수들이 쓰는 논문의 수준을 보면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쫒아가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 만큼 중국의 교수들과 학생 수준이 높아졌고, 공과 대학의 경쟁률이 의과 대학 보다 더 치열 하다는 어느 교수의 말이 부럽기만 할 뿐이다. 이것이 단지 인구와 내수 시장의 규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등소평의 ‘검은 고양이던 흰 고양이던 쥐만 잘 잡으면 된 다’ 라는 실리를 중시하는 흑묘백묘론은 중국 역시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던 기존의 정치 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오늘날 세계의 축 중 하나를 감당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아닌가 생각 된다.
2019년이 밝아 왔다. 올 한해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하고 무엇에 더 힘을 쏟아야 하는 지를 계획 하는 시기 이다. 2019년 필자의 화두는 당연 4차 산업 혁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2년간 너무 지겹게 들어 식상 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1차 산업 혁명은 100년간 진행이 되었고 1차 산업 혁명의 사상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 드리고 발전시킨 북미. 유럽 국가들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그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일본은 지난 400년을 잘 살아 왔고 여전히 세계의 패권 국가의 위용을 떨치고 있으나 이를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한 나라들은 아직까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차 산업 혁명의 시기를 놓쳤으나 300년후에 찾아온 전기전자 기술 혁명인 3차 산업 혁명의 물결을 적극 받아 드리고 변화함으로 다행스럽게도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3차 산업 혁명의 시기를 놓친 중국은 4차 산업 혁명을 중국 도약의 중요시기로 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올해 한해 무엇을 강조 하며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 우리는 행여 사농공상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학기술 혁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필자의 눈에는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논리나 논쟁들이 과연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 경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얼마나 먹거리를 만들어 주고 일자리를 창출하는지 의문이 든다. 여당과 야당이 논쟁하는 것들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 할 수는 있으나 과연 우리 젊은이들의 일자리 창출과 기업의 해외 진출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바뀌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원 원장들이나 교육기관 총장들을 보면서 과학기술도 명분과 형식의 문제로 전락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한다.
과학기술 분야에만 인생을 바친 안목 좁은 학자의 일방적인 바램 일 수는 있으나 우리나라의 국회가 4차 산업혁명의 데이터 산업 활성화와 개인 정보 보호와의 충돌 문제, 택시 기사들의 일자리 문제와 공유 경제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의 갈등 문제, 금융권의 규제와 핀테크 산업의 활성화 문제, 화폐의 디지털화 문제 등에 대하여 청와대와 격론을 벌이고 일간지의 주요 기사가 되는 2019년을 상상해 본다. 국민들의 관심이 소모적인 정치적 정쟁이 아니라 현실 산업의 문제,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신기술 개발 문제, 우리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의 문제에 더 쏠리길 기대 한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동안에도 경쟁국들의 변화와 기술적 혁신은 계속되고 있고 호시탐탐 우리의 시장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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