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
요가 수련자는 특별한 자신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마주치는 사람, 사물 그리고 삼라만상 각각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특별한 의미와 존재를 감지하고 인정하는 인간이다. 상대방의 다름이 곧 특별함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수련이다. 그(녀)의 특별함은 이것이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객관적으로 비교하여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감동적인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매일 매일 수련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런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배우고, 사랑하고, 경쟁하고 혹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학습(學習)'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지식을 외우거나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됨’을 발견하기 위해 나를 지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훈련시키는 인생의 커리큘럼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토로하거나 분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열망하는 그 무엇을 영민하게 알아차려 함께 즐거워하고 싶은 용기다. 경쟁(競爭)이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약육강식의 전략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개선시키려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다.
이 자아는 훈련되지 않는 본능에 의거한 ‘욕심(慾心)'과는 다르다. 욕심은 참된 자아를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먹구름이며, 자아실현을 위한 과정을 방해하고 숨겨버리는 거대한 블랙홀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기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을 삼라만상의 경계 위에서 바라보는 관찰자로 두지 않고, 우주의 그 중심에 둔다. 그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들은 그에게 하찮다. 자기중심적인 이미지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자아실현을 위한 지식, 요가수련자가 삼매경으로 진입하여 얻는 지혜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세계 넘어 존재한다. 이 지혜는 욕심의 영역을 지나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섬세하고 미세한 성질을 '요가수트라 I.49'에서 알린다.
요가수트라 I.49
파탄잘리는 삼매경을 통한 특별한 지식을 산스크리트어로 ‘프라즈나(prajñā)', 즉 ‘통찰(洞察)'이라고 불렀다. 통찰이란 한자는 이 단어의 핵심을 담고 있다. 한 마을의 생명을 담보하는 것은 공동 우물(洞)이다. 만일 이 우물이 오염되거나 고갈된다면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다. ‘통찰’이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현재 자신이 마주친 딜레마의 원천을 제사를 지내듯이 정성스럽게 숙고하는 마음(察)이다. ‘통찰’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인사이트(insight)'는 표면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인 내면으로 깊숙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전치사 ‘인(in)'과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 그 대상의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인 ’사이트(sight)'의 합성어다.
통찰이란 요가수련자의 어떤 대상에 대한 표면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다. 요가수련자가 요가의 어떤 개념이나 자세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다는 증거는 두 가지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첫째, 그 대상에 대한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이다. 예를 들어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이 문장은 객관적으로 참이다. 둘째, 그 대상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마치 ‘피아노 연주’와 같다. ‘내가 쇼팽의 녹턴’을 연주할 줄 안다’라는 문장에서의 ‘안다’와 ‘나는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사실을 안다’라는 문장에서의 ‘안다’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팽의 녹턴 연주의 정도는 피아노 연주자의 숙련도에 따라 다르다. 연주가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라는 문장에서의 ‘안다’는 ‘익숙하다,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혹은 ‘연습을 통해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다’라는 의미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일생을 통해 완벽한 피아노 연주를 수련해왔다면 그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최고의 예술가’라는 명예를 얻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 실력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배양된다. 어린아이가 인도경전 '바가바드기타'를 읽었을 때 그가 얻는 지식은 그가 성년이 되거나 혹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경험한 노년에 읽었을 때와 그 이해의 깊이와 너비가 다르다.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어진다. 이 깊어지는 지식이 통찰이다. 통찰에 해당하는 프라즈나는 ‘탁월한, 월등한’이란 의미를 지닌 접두어 ‘프라(pra-)'와 ‘(객관적인 사실을) 알다, (오랜 연습을 통해) 익숙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즈나(jñā)'의 합성어다. 요가수트라 I.49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통찰의 특징을 언급한다. “슈루타 아누마나 프라즈나-아브얌 안야 비샤야 시셰샤 아르싸트바트(śruta anumāna prajñābhyām anya viṣayā viśeṣa arthatvāt)" 이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삼매경에 진입하여 얻은 진리를 머금은 통찰은 경전 혹은 전통이나 추론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 대상이 지닌 특수한 목적과 의미에 몰입돼 있다.”
전통
통찰을 수련하지 않는 인간은 다음 두 가지에 쉽게 의존한다. 하나는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추론이다. 인간은 대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얻으려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구축해온 전통에서 쉽게 그 실마리를 찾는다. 전통이란 오랫동안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단결시키는 사회규범이다. 특히 종교를 그 종교답게 만드는 의례 혹은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슈루타(śruta)'라고 부른다. 슈루타는 ‘주의 깊게 듣다, 들리다, 배우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슈루(śru)'의 과거분사형이다. 그 의미는 ‘들은 것, 배운 것, 전해 내려온 것’이다.
전통은 ‘전해 내려온 것’으로 오늘이란 시간을 통해 재해석돼 의미 있게 작동돼야 한다. 전통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이 '창세기' 1장에 기록한 ‘우주창조’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기록한 기원전 6세기 무명 유대인 작가의 ‘우주창조 이야기’는 오늘날 재해석돼야 할 주요한 자료다. 만일 이 이야기를 간직한 종교인들이 ‘우주창조’ 이야기를 열린 텍스트가 아니라 닫힌 텍스트로 수용해 자신들의 교리 안에서만 해석한다면, 그 이야기가 지닌 생명력이 사라질 것이다. 통찰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전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통찰은 요가수련자의 수련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심오해지는 변화무쌍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흥한 소위 ‘대륙철학’에서 ‘전통’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주제가 됐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를 위시한 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시작이자 전통인 플라톤 철학의 ‘닫힌 전통’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을 과거가 아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추론
‘추론(推論)’이란 과거의 관찰에 의거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사상체계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에 연기가 피어 오른다면 그곳에 산불이 일어났다고 추론할 수 있다. 추론이란 의미의 산스크리트 단어 ‘아누마나(anumāna)'는 ‘-후에’라는 의미를 지닌 ‘아누(anu-)'와 ‘측정하다, 생각하다’란 의미를 지닌' 마(mā-)’의 합성어다. ‘아누마나’는 ‘다른 것을 측정하거나 생각한 후에 얻어진 생각’ 즉, 연역적인 추론을 의미한다.
어린아이가 과거에 불에 데인 경험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화상을 입어 고생한 경험이 있어 불은 그에게 무서움의 대상이 됐다. 그가 ‘불’과 마주치면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그는 불은 조절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다. 그가 불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피할 것이다. ‘추론’의 문제는 추론의 근거가 된 첫 번째 경험이 객관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불에 대한 온전한 이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눈앞에 등장한 대상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관찰하지 않고, 과거의 정보에 기대 판단한다면, 그것 역시 왜곡된 관찰일 수밖에 없다.
특수한 목적과 의미
요가수련자는 삼매경에 진입해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과거의 인상이나 전통 혹은 추론이나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 그는 그 대상이 존재하는 특별한 의미를 발굴한다. 요가수트라 I.43은 그 대상을 대상답게 만드는 것을 ‘아르싸(artha)', 즉 ‘존재의미’ 혹은 ‘존재목적’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마음을 비워 오감의 방해를 제거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대상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무런 편견 없이 볼 수 있다. 만물은 저마다 우주 안에서 저마다 특별한 목적이 있다. 각자가 지닌 자신만이 지닌 고유함이 탁월함을 산스크리트어 ‘비셰샤(viśeṣa)'라고 부른다. 인간은 대상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보고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요가를 오랫동안 수련한 자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게서 그 대상이 지닌 다름, 고유함 그리고 특별함을 발견한다. 필자는 거의 일년 동안 아주경제를 통해 연재한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제1장 삼매경(三昧經)을 마친다. 이 연재를 허락해 주신 곽영길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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