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 11시에 열릴 기념식은 일제에 심장부인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해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함이다.
행사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사 및 국민의례, 이봉창의사 약사 보고, 식사(式辭) 및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한편 이봉창 의사(1901년 8월 10일~1932년 10월 10일)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1931년 1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1년여의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실행을 결심한 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출국해 12월 말 동경에 도착했다.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해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봉창 의사는 거사일인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일왕이 나타나자 그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해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는데 그쳐, 일왕 폭살 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현장에서 체포된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했다.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됐다. 뿐만 아니라 만보산(萬寶山) 사건 이래 한ㆍ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됐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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