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말라! 이 말은 농담이나 풍자가 전혀 아니다. ‘돈은 법이다’는 이 풍진 세상살이에서 실감하는 ‘사실’일 뿐 만이 아니라 사전적 의미의 ‘사실’이다. 국어사전과 법률용어 사전도 돈을 가리켜 법적 재물, 법률상 강제 통용력과 지불 능력이 주어진 화물, 법화(法貨)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시인의 노래는 낙엽을 더욱 슬프게 한다. 낙엽은 슬프도록 아름답지만 주권없는 국가의 지폐는 슬플 따름이지 아름답지 않다. 따라서 돈, 특히 지폐는 국가다. 국가 없는 지폐는 없다. 금속 자체에 소재 가치가 있는 금⋅은⋅동화(貨)와 달리 지폐의 가치는 온전히 국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지폐는 한 나라의 모든 지(知)와 정(情)을 함축한 창조물이자 정체성을 나타내는 얼굴이다. 세계 지폐의 80% 이상이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을 넣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폐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보기 드문 특수성 일색이다. 그 특수성이 진취성·선진성을 담고 있다면 좋겠는데 퇴행성·후진성이 짙어서 탈이다. 문제점 일곱 가지를 지적하겠다.
첫째, 현재가 없다. 우리나라 지폐 인물엔 ‘대한민국’이 없다. 여전히 ‘조선왕국’이다. 세계 지폐인물은 국체(國體)를 반영하고 있다. 영국, 태국, 사우디 등 군주국이면 현직 군주를, 미국, 중국, 베트남, 인도 등 공화국이면 독립과 건국 지도자나 위업을 세운 정치지도자를 넣고 있다.
둘째, 미래가 없다. 각국의 지폐인물은 미래 지향점을 가리키며 국민에게 미래의 바람직한 인물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지폐인물은 성리학자가 주류를 이룬다. 모든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이자 누구나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공정한 시장경제노선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12세기 중국 송 나라의 주자학에 기초해야 하는가. 중상주의의 산물인 지폐에 중농억상의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는 게 참 희한한 일이다. 과거와 현재의 자녀는 미래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결혼이다. 우리 지폐인물에는 과거뿐이다. 과거, 그것도 16세기 이전의 과거 혼자만으로 어떻게 미래를 낳을 수 있겠는가.
셋째, 과거는 있되 주로 어두웠던 시대 인물들이다. 세계 지폐인물은 자국의 전성기, 또는 번영의 초석을 다진 근∙현대 인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을 제외한 나머지 우리 지폐 인물의 세 분은 모두 국력쇠퇴기였던 16세기의 인물에 해당한다. 사색당파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끝난 16세기가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직감하고 재현하고 싶은 세기인가. 반만년 찬란한 한민족 역사에 하필이면 16세기 인물뿐인가?
넷째, 높으신 분만 계신다. 세계의 지폐 인물은 독립과 건국 영웅이나 국가원수, 정치가 외에도 과학기술자, 영화배우, 실물경제인, 화가, 시인, 소설가, 건축가, 작곡가, 가수, 탐험가 등 누구라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고 구체적 업적 설명이 가능한 직종의 인물들이다. 우리나라처럼 군주와 철학자(성리학자)를 두 분씩이나 지폐에 모시고 있는, 더구나 어머니와 아들을 각각 별도로 고액권 지폐에 모시고 있는 나라를 찾지 못했다.
다섯째, 장기집권이 지나치다. 즉, 특정 인물의 장기 고착성이다. 지폐 인물은 10∼20년을 주기로 바꾸는 게 세계적 추세다. 일본은 2004년, 20년 만에 새 은행권을 발행했다. 당시 5000엔권 인물은 교육가 니토베 이나조에서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로, 1000엔 권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로 교체됐다.
영국은 1980년, 1993년, 2001년, 2007년 네 차례나 지폐 뒷면 인물들을 전원 물갈이하여 왔다.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중국·베트남·스웨덴·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두 차례, 필리핀·러시아·노르웨이는 세 차례 지폐의 모든 액면을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교체해 왔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 1000원권 퇴계 이황(1975년), 5000원권 율곡 이이(1977년), 10000원권 세종대왕(1979년)을 발행한 후 50000원권 신사임당(2009년)을 추가한 것 외는 강산이 네 번 이상 바뀐 세월이 넘도록 한 차례도 바꾸지 않고 있다.(<표2> 참조).
다섯째, 한 종류 지폐에 한 인물을 고수하고 있다. 영국·미국·필리핀 등 한 지폐에 여러 인물을 넣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영국은 모든 지폐 한 면에 여왕을 넣고, 다른 면에는 1∼2명의 인물을 넣는다. 영국의 모든 지폐 앞면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가 있다. 영국 최고액권 50파운드 지폐에는 3명의 인물이 있다. 미국은 2020년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을 20달러 지폐 앞에 넣을 것이다. 또한 10달러 뒷면에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모습을 추가하고, 5달러 지폐 뒷면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와 엘리노어 루스벨트 같은 인권운동가들의 모습을 지폐를 발행할 계획이다.
여섯째, 지폐의 종류가 너무 적다. 세계 각국 지폐 액면의 보편적 체계는 1.2.5. 단위를 채택하고 지폐의 종류도 5개종 이상이다(베트남 12개종, 미국·EU·러시아 7개종, 중국·사우디 6개종, 영국 5개종) 우리나라는 1.5.단위체계로 1000원권, 5000원권, 1만원권, 5만원권, 4개종 지폐뿐이다. 1000엔권, 5000엔권, 1만엔권 지폐 액면이 3종 뿐인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지폐의 종류가 적은 나라다(표<2>참조).
하지만 지폐의 종류가 적절히 다양해야 거래하기에 편리하고 특히 반만년 한국사를 빛낸 역사 인물과 항일독립운동 순국선열, 미래의 바람직한 국민상을 제시하는 위인들을 더욱 넉넉하고 여유롭게 모실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일곱째, 반민주적이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세계 각국은 지폐 인물을 자국의 국민선호도에 부합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교체해 왔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국은행은 청개구리인가? 국민여론 수렴을 거쳐 결정한 사항도 뒤엎어 버리고 국민선호도 최하위 인물들을 선정해왔다.
2007년 11월 5일 한국은행은 2009년 발행될 10만원권에 백범 김구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이는 국민 여론 수렴과 화폐 도안 자문위원회 논의, 그리고 정부와 협의를 거친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2008년 10월 14일 뉴라이트 등 이른바 ‘보수우익(?) 단체’들이 한국은행 앞에서,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 라는 주장을 펼치며 관제시위(?)를 했다. 그 시위 직후 한국은행은 “정부의 요청으로 10만원권의 발행을 유보한다”고 10만원권에 백범 김구를 넣기로 한 계획을 일거에 백지화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2001년 실시한 ‘현용 화폐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폐 인물로 누가 좋으냐는 물음에 세종대왕이 1위에 오른 반면 퇴계는 9위, 율곡은 10위 꼴찌를 차지했다. 그때도 한국은행은 설문조사 결과를 화폐 도안 변경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었다.(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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