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발레교습소'가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했다면 '풍산개'는 그의 연기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였고 '범죄도시' 장첸은 그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 또한 윤계상의 '발전'을 도운 작품이다. 주연배우로서 중심을 잡는 법과 막중한 중압감을 이겨내는 법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분)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이야기를 담은 '말모이'에서 윤계상은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주시경 선생이 남긴 원고로 사전을 만들기 위해 우리말, 우리글을 모으는 '말모이'의 중심 격인 셈이다.
정환은 "민족의 정신인 말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믿는 올곧은 인물이다. 유력 친일파 인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변절이 부끄러워 더욱 강력하게 일제에 맞선다.
"정환을 연기하면서 '감정'을 담아 연기하는 장면은 유독 테이크를 많이 찍었어요. 뭐랄까 너무 어렵더라고요. 정환의 배경 등이 차곡차곡 쌓여있지만, 문제를 확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 감정이나 서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나게 하는 게 어렵게 느껴졌어요. 정환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하니 어마무시하더라고요. '독립운동'이라는 대단한 일을 어찌 제가 감히 이해하겠어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 스스로를 "설득하고 이해한 뒤 연기를 시작한다"는 윤계상은 '독립운동가' 정환의 속내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가 된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졌다. 마치 "세살 먹은 아이가 40살 먹은 사람을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하는 것처럼" 벅찬 일이었다.
"촬영하는 4개월간 정환인 채로 지내려고 했어요. 예민하게 굴었는데도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해하고 다독여주셨죠.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류 대표'라고 불러주시고 감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별나다'고 하지 않고 '힘들겠다'고 감싸주시는데 정말 고맙더라고요."
윤계상은 상대 배우로 하여금 많은 기운과 영감을 얻었다며 다시 한번 배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극 중 '말모이' 원고를 일본군에 빼앗기는 신이 나와요. 그 장면을 찍을 때 저와 판수(유해진 분) 형님은 뒤늦게 들어가는데 그 세트장의 공기부터가 압박이 느껴지더라고요. 고요하고 적막한데도 슬픔이 느껴졌어요. 저도 모르게 그 슬픔에 동요하게 되더라고요. 출중한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니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게 되는 거 같아요. 몰입은 제 몫이지만 몰입하는 과정을 단축해주죠."
그를 비롯한 '말모이' 배우들은 이 기운을 그대로 이어가 "현장에서도 영어를 쓰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영화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이 거의 일본 말이더라고요. 안 쓰려고 하는데 대체할 용어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말을 하려다가 모르면 입을 다물어버리더라고요. 안타깝다고 생각했어요. 이따금 영어를 쓰면 똑똑해 보이는 것처럼 포장될 때가 있잖아요. 한글을 등한시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이 한글의 소중함을 아셨으면 좋겠어요. 제 지인들도 영화를 보곤 '반성하게 된다'고 했으니까요."
말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정환의 마음과 닿아서였을까? 윤계상은 이번 작품을 계기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눈에 띈 단어는 '민들레'예요. 들에 흐드러지게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시적이고 예쁘지 않나요? 무심하게 지나쳤던 말들이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아름답더라고요."
전작 '범죄도시'에서 폭발적인 감정 연기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윤계상은 '말모이'에서는 정적인 감정 연기로 또 한 번 변신을 거듭했다. 정환은 외적인 감정 표현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파동이 큰 인물로 다소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던 캐릭터. 윤계상은 "오직 진정성만이 해답"이라 생각, 인물에 접근해나갔다.
"연기 생활을 한 건 15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 저는 저를 못 믿어요. 촬영 끝나고 집에 올 때면 매번 후회만 하거든요. 스스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다만 '진정성'을 가지고 그 캐릭터에 부딪치는 건 자신 있어요.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연습하고, 절실하게 매달려야 하죠."
연기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언제나 불확실하다"는 윤계상. '진정성'을 무기로 언제나 작품과 캐릭터에 돌진한 탓에 오히려 주변에서는 "절실함을 조금 덜어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고.
"어떤 '재능'을 가진 배우들이 있잖아요. 어떤 역할에 특화되었다거나. 선한 역, 미남 역, 남성성이 강조된 역 등. 저는 '절실한 역할'이 제게 특화되어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와 뒤돌아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절실함을 가진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왔고 연기도 그런 식으로 죽을 둥 살 둥 절실하게 매달려 연기하는 편이었어요. 업계 사람들은 제게 '절실함을 좀 덜어내라'고 조언해요. 눈에 너무 보인다면서요."
그러나 윤계상의 절실함은 탄탄한 필모그래피로 이어졌다. 최근 몇 년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작품성 있는 작품과 한층 성장한 연기력으로 대중의 호평을 얻고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어떻게 주신 기회인데. 예전에는 너무 힘들고 지칠 때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하고 원망도 했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거더라고요. 지금은 절실하게 감사해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 같고요. 더 겸손해지고 있고요."
고된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감사함을 알게 되었다는 윤계상. 그는 여전히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고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여정을 즐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조급해하지 않을 거예요.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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