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순간
전 국정원장 이종찬(83)은 10세 때 특별한 사진 하나를 찍었다. 등 뒤에는 꽃다발을 목에 건 백범 김구가 서 있고, 그 왼쪽엔 조완구와 김규식이 보인다.오른쪽 한 켠엔 감회를 주체하기 어려운 듯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는 이시영도 서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뒤늦게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이 중국 상하이 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임정요인들은 미군이 내준 비행기를 타고 환국했지만 소년 이종찬은 난민선을 타고 돌아온다. 이 사진 한장에는 역사적인 유명인물들과 함께 한 '어린 자부심'도 숨어있겠지만, 그보다는 백범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며 해방을 축하했던 감회 또한 결정적 순간의 기억으로 핀업되어 있다.
# 결혼사진 속의 비밀
흰 도포에 대님을 하고 구두를 신은 22세의 신랑이 서 있고, 그 옆에 올림머리를 하고 흰 저고리에 짙은 색 치마를 입은 신부가 의자에 앉아있다. 우당기념관에 있는 이규학과 조계진의 1918년 결혼사진이다.
# 일제 작위 거절하고 두번 자결 시도한 조정구
조계진의 아버지는 조정구(1862~1926)다. 조정구의 고조할아버지는 조선 순조 때 세도가문의 핵심이던 대사헌 조득영이다. 조정구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였으며 규장각직제학, 예조참판을 거쳤고 왕실 의례를 담당하는 서리대신사무를 맡았으며 왕실 비서실장 격인 기로소비서장을 역임했다.
한일합방 때 의정부찬정 벼슬을 했던 것을 인정해 일제가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줬으나 거절한다. 합방조서와 발표문(고유문,告諭文)을 찢어버리고 합방에 항의하는 자결을 두 차례 시도했다. 이후 양주 사릉리에 은거하면서, 국망에도 죽지 못한 사람이란 의미로 자신을 미망인(未亡人)이라 자처했다. 1917년 월파거사(月坡居士)라는 이름으로 승려가 되어 금강산 반야암에 숨어산다.
# 이항복 10대손으로 신흥무관학교 설립한 이회영
이규학의 아버지는 우당 이회영(1867~1932)이다. 그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10대손이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 우당은 40여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 길림성 류하현으로 망명한다. 그는 독립군 산실이 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이끌어낸 이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1913년 학교 운영자금난을 겪던 이회영은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식민통치가 진행된 이후 위축된 국내 인사들이 몸을 사리며 거의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식어있음을 고민하던 이회영은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새로운 투쟁의 중심을 구축하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 고종 망명 프로젝트를 위해 '긴급 결혼식'?
고종 망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황제가 신임하는 측근과의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당시 고종과 독대할 수 있는 이는, 조정구와 그의 아들 조남승 및 조남익이었다. 남승은 비서승, 남익은 시종으로 황제의 비서관이었다. 양주에 있던 조정구를 만나 고종 망명을 타진했고, 그의 아들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이라는 하나의 목표 위에서 만난 이회영과 조정구는, 두 사람의 가문으로 보면 오랫동안 적대시하며 지내던 소론 백사공파 경주이씨와 노론 풍양조씨로 통혼조차 할 수 없는 집안들이었다.
식민지 하에서 황제를 망명시키는 엄청난 프로젝트에 합의하면서, 그들은 조선시대 당파의 불문율을 깼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과 조정구의 딸인 조계진을 결혼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결혼식에 일제의 눈을 돌리게 한 뒤, 그 틈을 타서 고종황제를 국외로 이동시킬 계획이었다.
조남승과 조남익은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 계획을 짰고 연락을 담당했다. 이후에도 고종황제는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기대했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파리강화회의가 시작되는 1919년 그는 다시 대한독립 의사를 밝힐 계획을 짰으나 친일파와 일제의 방해로 무산됐다. 당시 고종은 망명 외에는 나라를 구할 길이 없다고 판단했고, 조남승을 통해 접수한 이회영의 프로젝트에 적극 동의했다.
# 망명 프로젝트 직전에 주검이 된 고종황제
이규학과 조계진의 결혼사진은, 일제에 의해 경운궁(덕수궁) 깊숙이 유폐되어 있던 고종을 빼돌리려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숨기고 있는 현장사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해 1월21일 아침 황제는 주검이 되어 있었다. 궁녀가 건넨 식혜를 마신 뒤 고통에 일그러지고 녹아내린 끔찍한 형상으로 최후를 맞았다.
일제가 이 망명계획을 알았을까. 당시 일본 고위관료의 기록에 의하면, 그게 아니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문건에 고종이 서명했으며 끝내 그것을 철회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고종 독살이 망명계획 때문이 아니었다면, 시간적인 우연이 우리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종 서거는 삼일운동과 임시정부라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 방아쇠가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해야할까.
# 중국엔 망명할 고종의 거처까지 마련
이후 2월24일 이회영은 아들 부부와 함께 북경으로 망명한다. 조정구와 남승 남익도 함께 떠난다. 고종 망명을 위해 급히 치러진 역사적 결혼, 이규학과 조계진은, 1936년에 중국 상해에서 이종찬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퇴임한 뒤 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을 맡은 그 분이다.
이종찬은 최근 중국의 산동성 교주만에 고종의 해외거처를 마련했던 사실을 확인했다. 왕실 비서관 조남승(이종찬의 외삼촌)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집을 은밀히 매각했다는 일제 영사관의 보고서를 찾아낸 것이다. 이회영은 북경에 망명할 고종을 위한 행궁을 만들어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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