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 좌담에 들어있는 '고종 암군론'
한겨레는 2019년 1월23일 역사학자 좌담 기사를 실었다. 임경석(성균관대 사학과),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김정인(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이 자리에서 입을 모아 고종을 비판했다. 이른바 고종 암군론(暗君論, 멍청한 군주로 보는 관점)을 지지한 셈이다.
"1989년에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운동을 할 때 고종이 거의 동의했다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꿈꾼다는 야밤의 벽보 때문에 독립협회 사람들을 체포하고 의회 개설 운동을 무위로 돌렸다. 그리고 1899년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통해서 전제군주제의 굳건함을 반포했는데 그 자체가 반동적이다."(김정인)
"황실은 식민지화에 앞장 서서 협력했다. 반민족행위자다. 대한민국 황실이 일본 천황의 하위 위계를 갖는 이왕가 집단으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이왕가로서의 합당한 예우를 일본제국에 의해 보장받았다. 그래서 왕족으로서 가졌던 특권과 재산, 사회적 지위, 명성을 식민지하에서도 향유했음을 인정해야 한다."(임경석)
"1890년대 말 전국적으로 민란이 많이 일어났다. 황실이 중심이 돼 정부 재정으로 들어갈 세원을 황실로 많이 돌려놓아 정부재정은 빈약해지고 황실 재정은 늘어난다. 또 고종은 주요 대신들을 몇 달 안돼 계속 바꿨다. 정부가 취약해졌다. 굉장히 큰 문제였다."(박찬승)
# 고종을 반민족행위자라고 볼 수 있나
이런 주장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 속 인물을 재단하고 평가함으로써 당시 현실 속에서 군주로서의 고종의 입장을 매도하는 인상이 있다. 독립협회의 의회 개설과 관련해 고종이 취한 조치는 군주로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 취할 수 밖에 없었을 조치로 볼 수도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전제군주제 자체가 청산해야할 구시대 유물처럼 보이지만, 고종의 시대에는 여전히 진행형의 국가시스템이었다. 그것을 반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거친 잣대다.
임경석교수의 주장은 더 급진(?)적이다. 황실이 식민지화에 앞장 섰다는 견해는, 일견 수긍이 가는 대목도 있지만, 나라를 병탄당한 당시 상황에서 황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으며 일제의 예우 또한 협상에 의해 받은 것이 아니라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는 단계적인 수단으로써 저항을 줄이기 위해 택한 조치라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그것이 반민족 행위라는 지적은, 선택지가 없었던 당대를 치밀하게 고민한 결과가 아닌, 지금의 시선과 지금의 가치관으로 재단한 비판에 가깝다. 박찬승교수의 견해는 실정(失政)을 부각시키는 얘기이긴 하겠으나, 고종을 암군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것들이다.
# 26세 청나라 권력자 위안스카이의 모욕적 호칭
갑신정변 이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의 26세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았고 그를 혼군(昏君, 답답한 임금)으로 칭했다. 주차조선총리교섭사의라는 직책을 맡은 그는 정부 관리 20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바꾸는 정변 같은 인사를 단행한다. 이때가 1883년이었다. 이른바 고종 암군론은 위안스카이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된 셈이다.
1898년 독립협회 제2대 의장을 지낸 윤치호(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인물이다)는 "사람들이 황제를 증오하기에 그를 망신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환영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그의 퇴위를 주장했다. 그의 이런 평가는 당시 국민들의 일정한 정서를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독립협회와 관련한 고종과의 갈등을 함의하는 말일 수도 있다.
# 고종 퇴위시킨 일제가 "암주(暗主, 멍청한 군주)"라 불러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문제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이때 일본은 고종을 암주(暗主, 멍청한 군주)라고 표현했다. 그해 12월에 나온 한국정미정변사(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경성지국 기자인 나라사키가 출판)에 그런 칭호가 기록되어 있다.
1910년 한일합방 무렵에 나온 이케다의 '일한합방소사'를 비롯한 일제의 역사서들은 고종의 역할이나 공로를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광무개혁의 근대화 작업이나 독립문 건립 같은 사업을 왜곡했고,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고종에 대한 존숭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정한다.
# 외국인 학자들 "고종은 능동적이었다"
외국인의 경우는 대개 고종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스위스인으로 서울대 규장각에서 근무하며 연구를 했던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 , 하버드대 박사, 런던대 명예교수)는 "고종이 당시 각종 사안에 대해 능동적으로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한다. 1886년부터 4년간 협판내무부사 겸 외아문 장교사로 고종을 도왔던 미국인 데니는 고종에 대해 "주권 수호의 의지가 확고했고,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다"며 사례를 열거하기도 한다.
1896년에 나온 '코리안 레퍼지터리'에는 고종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들어있는데, 그의 역할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외교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의 경우는 다소 부정적인 관점이 들어있다.을사조약 무효화 운동과 관련해 고종의 역할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 일본인 기자도 "고종은 명군(明君)"
한편 한성신문 기자로 을미사변에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 '근대조선사'(1936,1939 발간)는 고종을 '암군이 아닌 명군(明君)'으로 묘사한다. 열강 속에서 내정에 힘쓸 겨를이 없었고 외교에 전력하다가 끝내 국세를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말하고 있다. 기쿠치는 고종이 일본과 러시아의 알력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평양 이궁(離宮)을 만들고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동맹을 요청하는 역량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또 각종 근대적 기구나 서양문물 수용이 고종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치적들이 일본 합병에 의해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산멸했다고 지적한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과, 안중근 하얼빈 학회 공동대표)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자료에서 1910년 문건을 발견해 공개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와 조선통감이 고무라 일본 외무대신에게 각각 보낸 보고서 6건이다. 이 문건에는 고종의 밀사2명이, 일본법정에서 러시아법정으로 안중근 관할권을 옮겨 구해내려 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안중근 의거는 고종의 프로젝트였다
보고서에는 "작년 10월 하얼빈 흉변(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고종이 크라스키노(러시아 하산스키군의 마을)의 최재형을 선동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안중근 의거가 고종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얘기다.
보고서에는 또 "니코리스크 시에서 사망한 이용익도 고종의 밀사로서 그가 가지고온 내탕금(왕의 사비) 잔금 7천엔은 지금도 최봉준의 집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이토 저격 사건에 고종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 고종 암군론의 논리들
한겨레 좌담의 임경석 교수 주장은 그간 고종 암군론에서 자주 등장했던 논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었으나 고종은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 합방 뒤에는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일본 메이지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접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국가지도자로서의 무책임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굴욕'을 감수하면서, 보다 실효가 있는 독립운동을 꿈꾸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헤이그 밀사 파견이나 파리강화회의 문서 서명, 그리고 북경 망명 등을 꾀한 것은 그것을 입증한다.
또 박찬승교수 주장의 일부는, 유학자 매천 황현이 비판하던 내용이다. 즉 고종은 원자가 태어난 뒤 8도강산을 순회하며 제사를 지낸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 되어 내수사에선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호조와 선혜청 공금을 빌려 쓰기도 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곳이며 국고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나라가 큰 위기를 맞고 있던 시점에,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정신 나간 행위처럼 보이기는 하나, 왕국의 대를 잇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던 국가의 끝자락에서 상황과는 부적절할 망정, 그 맥락이 군주의 '명암'을 만들어낼 만큼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었다는 관점도 가능하다.
# 고종 암군론은 일제가 확산시킨 불온한 로직
고종에 관한 암군론은, 일제가 황제의 제거를 합리화하고 국가 찬탈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강화한 불온한 로직에 가깝다. 고종이 위기 대처에 최고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으나, 적어도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다가 일제의 독살에 희생된 비운의 황제였던 사실까지를 부정하는 일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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