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독립국이다” 동농 항의에 청나라·일본 외교관이 움찔했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해인 기자
입력 2019-01-23 18:0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⑨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

[새비지가 그린 동농 초상화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새비지-랜도어, 신복룡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서양인이 쓴 최초의 조선 견문기는 하멜의 표류기다. 이 책은 1668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는데, 같은 해 영역본(英譯本)․불역본(佛譯本)․독역본(獨譯本)이 나왔다(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때는 1934년이다). 200년이 지나 조선이 개항하면서, 많은 수의 서양인들이 ‘합법적으로’ 조선 땅을 밟았고, 이들에 의해 다수의 견문기가 쓰였다(이 기록들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발굴해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로 펴낸 바 있다).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는 영국인으로, 조선을 두 번 방문하고, 1895년 <Corea or Cho-sen: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견문기를 썼는데, 이 책에 동농 김가진이 등장한다. 세계를 주름잡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인의 눈에도, 동농은 비범한 외교관으로 비쳤던 것 같다.

◆고종의 고뇌(苦惱)
고종이 일본에 공사관을 설치한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 외교무대에서 활약하던 각국 외교관들이 관측한 대로,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조선으로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감국(監國)’이라는 감투를 달고 총독 행세를 하던 위안스카이는, ‘한러밀약’에 분개해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겠다고 협박했다. 따라서, 주일 공사관 설치는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고심 끝에 마련한 돌파구였다.
조선의 왕권을 위협한 최대의 적은 왕비들이었다. 남편은 안중에도 없고 오매불망 친정의 부귀영화만 생각했던 혜경궁(惠慶宮) 홍씨는 약과다. 안동김씨 60년 세도의 터를 닦은 순조(純祖)의 부인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친동생 김좌근(金左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불행히 내 집에서 패악한 자식이 나와, 이 남의 없는 일을 당하니 무어라 말할 길 없다.” “패악한 자식”은 순원왕후의 손자인 헌종(憲宗)을, “남의 없는 일”은 그녀의 오른팔이었던 6촌형제 김흥근(金興根)이 유배당한 일을 가리킨다(변원림, <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조선사회의 동요> 참고). 왕가에 시집온 주제에, 그것도 피를 나눠준 손자에게, 왕권 회복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패악한 자식”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 왕비. 고종이 불안했던 점 역시 민비의 ‘더블플레이’였다. 민씨들은 청나라에 딱 붙어 있었고, ‘한러밀약’이 들통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듯이, 위안스카이는 그들을 고종을 감시하는 간자(間者)로 부렸다. 이런 터에, 주일공사관이 고종 뜻대로 움직이도록 방관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종은 주일공사관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아야 했다. 그 적임자가 바로 동농이었다. 충직하고 일처리 솜씨도 매끄러우며, 일본어에도 능통하고, 청나라에 파견해 일을 시켜보았더니 외교적 수완도 남다르다.
“주상은 대간(臺諫)이 단자(單子)를 올리자 장령(掌令, 사헌부 종4품 벼슬) 김가진의 이름을 특별히 써넣어 낙점(落點)했다.”(<승정원일기> 1887년 5월 21일, 신동준의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애당초 물망에 올라 있지 않았던 김가진을, 고종이 발탁했다는 의미다. 초대 주일공사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와 민씨들의 합작품이었다면,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 김가진은 오로지 고종의 의지였다.

◆탈청반민(脫淸反閔)에 힘쓰라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외교 방안을 강구하라. 그리고, 민씨들의 국정농단에 휘둘리지 말라. 이것이 고종이 내린 밀명의 뜻이었고, 이로써 동농은 탈청(脫淸)과 반민(反閔)의 선봉장이 된 셈이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움직임은 예로써 하여 임금의 명령을 욕되이 하지 않으며(動必以禮 不辱君命), 모든 행동은 신의로써 하여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다(行必以信 無損國體).”(김가진, <이력서>, 한홍구의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파트너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동농이 일본에 부임하기 전, 주일본 청국공사 쉬청쭈(徐承祖)에게 서한을 보내, “민영준이 무능하고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으며, 만일 그가 그 직을 수행하고 돌아오면 김가진이 대신 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위안스카이의 예측은 정확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사촌들 손에 넘기고 떠난 게 배가 아팠던지, 민영준은 국서(國書)만 전달하고 한 달 만에 귀국해버렸다.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업무는 동농이 도맡게 되었다. 그는 고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최초의 외국 주재 공사관. 최초의 외국 주재 상주외교관. 김가진이 지휘하는 주일본 조선공사관 일상업무의 초점은 전적으로 고종의 부국강병책을 뒷받침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의 근대화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동농은 일본을 통해 서양문물의 정수(精髓)인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본국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주일공사관 시절, 동농이 가장 역점을 둔 임무는 반청(反淸) 자주외교(自主外交)였다. 공사 민영준이 귀국하고 나자, 주일 청국공사 리수창(黎庶昌)은 김가진을 불렀다. 상국(上國)의 공사관에 와서 신고하라는 거다. 그는 안 가고 버텼다. 리수창은 위안스카이에게 연락했고, 위안스카이는 다시 조정에 압력을 가했다. 동농은 근 1년이 지나서야 청국공사관을 찾았는데, 그 목적은 신고가 아니라 부당한 압력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동농은 고종 25년(1888) 11월 청국공사관을 다시 방문, 흠차주차일본국서리판리대신(欽差駐箚日本國署理辦理大臣, 요즘으로 치면 주일본 한국대사 서리)의 자격으로 위안스카이의 본국송환을 공식 요청하는 문서를 리수창에게 전달했다. 청나라로서는 김가진이 눈엣가시였을 테고, 민씨들로서도 그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새비지-랜도어에게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말한 건,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게다.

◆“조선은 당당한 독립국”
청나라 외교관들이 무례하게 굴기라도 하면, 동농은 공사석을 불문하고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 어느 모임에서 청국공사 왕펑자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흰소리를 내뱉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조선은 당당한 독립국이다.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44)

1890년 10월 어느 날의 일이다.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아오키가 몇해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당신이 열심히 뛰고 있는 건 사실이나 결국은 별다른 수가 없을 거라는, 일종의 야유다. 동농은 정색하고 맞받았다.
“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국가와 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44)

동농의 당당한 언행(言行)에, 그를 대하는 도쿄 외교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청나라 눈치나 보는 약소국이라고 깔보다가, 자주외교를 실천하는 그에게서 조선이란 나라의 저력을 엿보았던 것일까.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청나라와 자웅(雌雄)을 겨루던 일본은 더 곡진(曲盡)하게 동농을 대접했다. 동농은 그 호의를 짐짓 받아들였다. 그렇다. 지금은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최선의 수다. 그러나 낯선 땅 일본에서, 동농이 조국에 시간을 벌어주려 고군분투하고 있던 그 순간에도, 조정은 정신 못 차리고 있었으니….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
 

[민영준]




민비의 오른팔 노릇하다 淸·日에 붙어 재물 챙겨

민영준 (閔泳駿, 1852~1935)
민비(閔妃)의 오른팔이자 민씨 일파의 우두머리 중 한 명. 대표적인 친청파(親淸派)였으나, 민비가 살해당한 뒤에는 일본에 붙었다. 가렴주구로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았고,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최고 부자로 여생을 누렸다. 1901년, 민영휘(閔泳徽)로 개명했다.
스물여섯이던 1877년 별시(別試) 병과에서 장원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임오군란이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 일이었는데, 성난 군민이 그의 집을 박살 냈을 정도로 일찍부터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 갑오농민전쟁(1894)이 일어나자, 민비의 지시를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면서 실각했고, ‘탐학죄’로 전라도 임자도에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청나라에 도피했다가 1895년 7월 사면돼 귀국했다. 이게 을미사변(乙未事變) 한 달 전의 일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 이후 다시 ‘탐학죄’로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곧 풀려나 중추원 의장에 임명되었고, 궁내부 특진관, 장례원경, 육군부장 등을 잇달아 맡았다. 이 무렵, 일본에 줄을 선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2월 시종원경 자격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대신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1907년 7월에는 고종에게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양위하라고 요구했다. 1909년에는 소위 ‘합방(合邦)’을 청원하기 위해 이완용이 조직한 국민연설회에 총대위원으로 참여했으며, 합방 찬성운동을 벌인 정우회 총재로 활약하고, 부역의 대가로 경술국치 직후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민영준의 생애는, 민비와 민씨 일파들이 조선을 어떻게 망국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고, 개화당의 싹을 자른 것으로도 모자라, 조선을 외국군대의 싸움터로 내어준 그들. 더 한심한 것은 일족에게 부귀영화를 선사한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음에도, 제 한 몸의 보신을 위해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사실이다.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시세(時勢)를 좇아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민영준과 반청(反淸) 자주외교의 선봉으로 출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삶을 마친 동농. 그 두 사람은 애당초 뜻을 맞출 수 없는 사이였다. 실제로, 민비가 죽을 때까지 민씨들은 사사건건 동농의 개혁정책에 훼방을 놓았다. 동농이 만 4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주일공사 직책에서 물러나게 된 것 역시 그들이 고종을 다그쳤기 때문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