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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칼럼] 덕을 쌓는 집안에는 좋은 일이 많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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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19-01-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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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차가운 겨울 이른 아침의 청랭함을 코끝으로 맞으며 안동댐 호반길을 따라 도산서원(도산서당 포함)으로 향했다.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단체가 주관하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답사팀과 종가(宗家)순례 일정을 함께한 덕분이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 승려들의 기여도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10여년 전 인근에 있는 용수사(龍壽寺)를 찾았을 때 이미 들은 바 있다.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은 20세 때 용수사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 인연으로 절집과 친분이 두터웠다. 제자와 후손들을 수시로 용수사로 보내 책 읽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도산서당 안의 완락재(玩樂齋)라는 공간 옆에 부엌을 끼고 있는 아주 작은 방에는 정일(淨一) 스님이 머물렀다고 한다. 스님은 이 집의 실질적 준공자다. 먼저 목수인 동시에 기와장인(匠人)인 스승 법연(法蓮) 스님이 도편수 직책을 맡아 공사를 시작했다. 일의 순서상 기와 굽는 일이 우선이었다. 재정이 부족하면 경주까지 가서 기금을 모아올 만큼 적극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본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병으로 입적했다. 제자인 정일 스님이 그 뒤를 이어받아 5년 만에 완공(1561년)할 수 있었다.

그때 건축주인 퇴계 선생의 설계도를 존중해 달라는 당부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이후의 용도까지 고려하여 임의로 마루방을 넓히는 일부 설계변경을 했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이심전심 합의였다. 뒷날 그 마루도 좁았던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마루 한 칸을 더 달아냈다고 한다. 하기야 서당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이다. 가정집이 아니라 학교다. 공공건축의 노하우는 당시에 절집 목수가 최고임을 알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존중하는 묵인이었던 셈이다. 원칙과 실용성을 겸비한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낙성 후에도 정일 스님은 안살림까지 일정부분 맡았다. 서당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절집인 까닭에 공양주(주방 책임자)로서 지역사회의 학동들을 뒷바라지했다. 혹여 스님이 출타할 경우에는 학생을 받지도 못하고 때로는 집으로 보내야 할 만큼 기여도가 높았다. 유생과 승려가 함께한 공간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신은 삶 자체가 소박하고 검소했다. 사당의 위패도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 다섯 글자였다. 이름을 제외한다면 두 글자뿐이다. 묘소의 비석도 마찬가지다. 앞에 붙은 수식어는 ‘퇴도만은(退陶晩隱,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에 영원히 숨은 곳)’이라는 네 글자였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했던가. 지나친 예우가 오히려 실례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장황한 수식어 때문에 오히려 주인공의 본래 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법정(1932~2010) 스님 위패는 절집에서 관례적으로 이름 앞에 붙이는 10자 이상 되는 모든 수식어를 생략하고 ‘비구 법정’이라는 단 네 글자만 썼다. 그 자체가 ‘무소유’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어 모두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도(陶)’에도 ‘퇴(退)’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머물던 자리가 현재의 지명대로 한다면 도산면(陶山面)이며 동네 이름은 토계리(兎溪里)다. 계곡을 따라 토끼가 다닐 만큼 작은 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토계’는 자연스럽게 ‘퇴계’가 되었다.

묘소 참배를 마친 후 선생의 태실이 있는 노송정(老松亭)을 찾았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1424~1488)은 단종임금께서 타의로 퇴위한 이후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를 선택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안다는 의미를 빌려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하였다. 소나무를 대신한 향나무가 엄청난 넓이의 그늘을 자랑하며 집 입구마당 한편을 뒤덮고 있다.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이 아니라 반향(盤香)이 당신의 뜻을 오늘까지 말없이 전한다. 노송정 종가 뒤편에는 조상들의 묘소관리를 위한 재실인 수곡암(樹谷庵)을 건립했다. 기문(記文)에 의하면 용수사 설희(雪熙) 스님이 수곡암을 지었다고 한다. 동당에는 유생이 거주했고 서당에는 설희 스님이 거처했다. 종가에서 선물 받은 '퇴계선생 일대기'(권오봉 저)에는 고맙게도 이런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계양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있는 은거명당인 경북 봉화에서 훈도(訓導, 향교 교육을 담당한 교관)를 지내며 소일했다. 어느 날 안동으로 오다가 고갯길인 신라재에서 쓰러져 있는 노승을 발견하고는 정성을 다해 구호했다. 노승이 은혜를 갚고자 좋은 집터를 잡아준 것이 현재의 자리라고 한다. 이후 가문은 날로 번성하였다. 손자인 퇴계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탄생에서 별세 이후 흔적을 답사하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덕을 쌓는 집안에는 좋은 일이 많다)'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름 없는 평범한 노승을 구해준 적선의 씨앗이 명문가를 이루었고, 이후 유가(儒家)와 불가(佛家)가 서로 교류하면서 한 차원 더 높은 지역문화를 꽃피웠다. 이후 지역의 절집(봉정사)은 201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서원(도산서원, 병산서원) 역시 2019년 등록예정이라는 큰 경사의 밀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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