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日제로금리 실험 20년...성공과 실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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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회 기자
입력 2019-02-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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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J 제로금리 도입 20주년...유례없는 실험 금융위기 이후 美연준, ECB도 모방

  • 섣부른 통화정책 정상화 역풍 교훈...블룸버그 "성공 아니지만, 실패도 아냐"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사진=연합뉴스]


1997년은 일본 금융사(史)에서 '악몽의 해'로 통한다. 그해 11월 내로라하던 금융회사들이 줄도산했다. 산요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 등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야마이치증권은 당시 일본 4대 증권사로 꼽혔다. 이 회사의 몰락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리먼브더더스 파산(2009년 9월), 이른바 '리먼사태'에 버금가는 충격을 일본에 안겼다.

물론 일본 경제도 악몽을 피할 수 없었다. 97년을 정점으로 이듬해부터 주요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쳤다. 지금까지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디플레이션 악몽이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앞으로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소비 및 투자 위축에 따른 경기불황으로 이어진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991~92년 자산거품이 터지자 6%에 달했던 기준금리를 연거푸 낮췄다. 일본 기준금리는 1995년 0.5%, 1998년 9월엔 0.25%가 됐다. 당시 기준으로는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한계치에 도달한 셈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더 극단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1999년 2월 12일. 하야미 마사루 당시 BOJ 총재가 주재한 통화정책회의(금융정책결정회의)에는 이례적으로 경제부 장관 등 정부 관리 4명이 동석했다. 이들은 논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막후에서 하야미 총재의 '행동'을 압박했다고 한다. 관리들 중 한 명은 하야미 총재에게 BOJ가 국채를 매입하면 안 되는 이유를 캐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BOJ는 이날 결국 기준금리를 0%로 낮췄다. 사상 유례없는 '제로금리' 시대가 열린 것이다.

10년 만기 일본 국채 금리가 3개월 새 2배로 뛰고,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불과 반년 만에 8년 저점에서 20% 넘게 치솟았을 때다. 

당시 BOJ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해 제로금리 결정에 반대표를 던진 시노스카 에이코는 블룸버그에 "BOJ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동료였던 고토 야스오 위원이 당시 "BOJ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야기로 들어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日 '제로금리' 실험 20년...'도돌이표'의 연속

BOJ의 제로금리 도입은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선 걸 의미했다. 어떤 중앙은행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BOJ는 2년 뒤 제로금리 기조 아래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일본에선 '금융완화'라고 함)'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일본 관리들이 요구한 대로 필요 이상의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또 하나의 유례없는 통화부양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이때만 해도 BOJ가 취한 일련의 통화부양책은 특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기준금리는 5%대에 머물러 있었다. 제로금리는 낯설었고, 중앙은행이 돈을 풀기 위해 국채를 매입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에 대한 낯설음은 그러나 별로 오래 가지 않았다. 2008년 리먼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이 제로금리 기조에 합류했고, 줄줄이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ECB는 한발 더 나가 2014년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BOJ도 2016년 마이너스 금리 행렬에 뛰어들었다.

주목할 건 연준·ECB와 BOJ의 현재 처지가 상반된다는 점이다. 연준은 2014년 양적완화를 중단한 데 이어 이듬해 금리인상을 단행하며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섰다. ECB도 이미 비슷한 행보를 예고한 상태다. 반면 BOJ는 여전히 비상카드를 내던질 수 없는 처지다.

블룸버그는 BOJ의 20년 경험이 중앙은행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광범위한 경제개혁과 재정정책이 통화정책과 들어맞아야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을 준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과 재정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통신은 또 BOJ의 경험을 보면 통화정책 기조를 섣불리 바꾸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BOJ는 제로금리를 도입한 이듬해인 2000년에 기준금리를 0.25%로 인상했다. 불행히도 미국에서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BOJ는 2001년에 다시 금리를 제로로 되돌리고, 양적완화라는 미지의 카드까지 꺼내들어야 했다.  

BOJ는 제로금리·양적완화 기조를 5년간 유지했지만 2006년에 또다시 섣불리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서면서 화를 자초했다. 통화부양 덕분에 경제 성장세가 빨라지고 물가 상승세에도 다소 힘이 실리는 듯했지만, 이듬해 미국 부동산시장이 무너지면서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BOJ는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됐다. BOJ는 결국 2010년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재도입했다.

◆2차원 완화, 마이너스 금리...'양치기 소년' 된 구로다

BOJ가 다시 통화부양 공세에 나선 건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가 취임하면서다. 구로다 총재는 같은 해 4월 취임 이후 처음 주재한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2년 안에 물가성장률 2% 달성'이라는 목표를 천명하고 대규모 통화부양에 나섰다. 당시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마이너스였다.

구로다 총재가 통화부양 공세에 나선 건 2012년 말 취임한 아베 신조 총리의 공약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가 내건 핵심 공약은 '디플레이션 탈출'. 

이를 위해 구로다 총재는 제로금리 기조를 유지한 채 양적완화 효과 극대화를 꾀했다. 이른바 '2차원 완화'를 통해서다. 2차원 완화는 매입 자산 규모를 대폭 늘리고, 매입 대상을 안전자산인 국채에서 상장지수펀드(ETF), 부동산투자신탁(J-REITs)을 비롯한 위험자산으로 확대하는 걸 의미한다. 

구로다 총재는 이에 더해 2016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기준금리는 현재까지 -0.1%로 유지되고 있다. 구로다 총재는 2016년 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춘 뒤 필요하면 '3차원 완화'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자산매입 규모(양적 완화)와 대상(질적 완화)을 늘리고 이미 마이너스 영역에 있는 기준금리를 더 낮출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구로다 총재가 '2년 안에 물가성장률 2% 달성'이라는 목표를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물가상승률 2% 달성 시한을 6차례나 미뤘다. 급기야 지난해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는 '2019년쯤'으로 돼 있던 시한을 아예 없앴다. 자신 없다는 의미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0.3%(전년대비)에 불과했다.

◆20년 초저금리 역풍..."성공 아니지만 그나마 없었으면..."

블룸버그는 BOJ가 20년간 유지한 초저금리 기조가 오히려 저축 비중이 높은 일본인들에게 타격을 줬다고 지적했다. 예금금리뿐 아니라 대출금리가 뚝 떨어지면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한계기업(좀비기업)들이 버티게 됐고, 대기업들은 좀 더 높은 수익을 찾아 해외로 투자처를 옮기는 부작용도 일어났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BOJ의 갖은 노력에도 물가상승세에 힘이 실리지 않자 소비자들은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소비를 미루게 됐다. 초저금리 역풍에 은행권과 채권시장이 타격을 받으면서 돈의 흐름도 끊겼다. 

블룸버그는 그럼에도 BOJ가 감행한 세계 최대 규모의 통화정책 실험이 없었다면, 일본 경제가 더 나빠졌을 것이라고 봤다.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도 아니라는 평가다. BOJ의 통화부양 공세로 적어도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 일본 경제가 최근 몇년간 성장세를 뽐내면서 일자리 천국으로 부상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의 구직자 1인당 일자리, 이른바 유효구인배율은 지난해 평균 1.61배로 197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실업률은 2.4%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다. 지난해 5월엔 2.2%로 2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다소 오른 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자발적 퇴직' 탓이라는 분석이 많다.  

마스지마 유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 애널리스트는 BOJ의 행보에 대해 "천천히 죽느냐, 위험하지만 강력한 처방을 내리느냐에 대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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