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협 손 잡고 민국의 시대에 발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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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기자
입력 2019-02-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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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⑱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만세운동 당시 덕수궁 앞의 시위대열]


동농은 순종 즉위년인 1907년 11월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규장각은 그가 관직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곳이다. 그러나 마음은 떠나 있었다. 나는 고종의 신하라고 자처하던 동농. 자신을 등용해준 고종이 폐위됐다. 그의 자필 이력서는 이 무렵 일상을 “염퇴한거”라고 적어놓았다. “염퇴(恬退, 벼슬에 뜻이 없어 물러남)”는 맞지만, “한거(閑居)”는 허탈한 심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관직 생활을 접은 동농이 대한협회 회장으로 고심하던 대한제국 최후의 2년, 그의 행보를 좌우한 건 유폐된 고종의 안위였다. 망국 전야(前夜), 쫓겨난 군왕과 물러난 대신이 머리를 맞대고 왜놈의 귀를 피해 필담으로 정국의 향방을 점치는 모습. 민중에게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었겠으나, 그것이 500년 왕실이 토해낸 마지막 가쁜 숨이었다.
대한협회마저 해산당하자, 동농은 만사에 뜻을 잃었다. 일제가 작위를 줘도 내팽개치지 않았다. 부르면 나가고, 안 부르면 틀어박혔다. 병인양요(1866) 이래 45년째 팽팽히 당기고 있던 활시위는 끊어지고 말았다. 일본인의 농간으로 백운장도 잃었다. 체부동의 쇠락한 누거(陋居)에 웅크린 그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이따금 옛 주군을 뵈러 집을 나설 때, 주름진 얼굴에 생기(生氣)가 살짝 비쳤다. 1919년 1월 16일, 동농은 덕수궁에서 고종을 만났다. 신하는 원망하지 않았고, 왕은 자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과거를 더듬었을 뿐이다. 대궐을 벗어난 동농의 눈에 시린 겨울 하늘이 들어왔다. 훙서(薨逝)의 기별(奇別)이 닿은 건 그로부터 5일 뒤였다.

◆기미년(己未年), 이천만 동포가 일어섰다
갑오(甲午) 농민군부터, 을미(乙未)-을사(乙巳)-정미(丁未)-경술(庚戌) 의병. 민중은 굴하지 않고 싸웠다. 연인원 일백수십만이 궐기했고, 일본군이 보고한 전사자만 21,485명이었다. 갑오년에서 경술년까지 26년 동안, 이들이 치른 전투야말로 독립전쟁이었다. 망국을 이완용과 이토의 협잡으로 모는 건 떳떳한 자세라 할 수 없다. 소위 ‘합방(合邦)’은 독립전쟁에서 패한 결과이며, 한 명이라도 더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잃은 동량(棟梁)과 간성(干城)이 얼마인가. 학계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시기 희생자는 수십만에 달한다. 그것은 국권 상실같이 겉으로 드러난 상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정말 을씨년스러웠다. 후일을 기약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자식을 유학 보낸 자산가들이 대개 그랬다. 이천만 동포는 숨죽인 듯했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겁을 먹은 것인가. 아니다. 민중은 내상(內傷)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가 떠올랐다. 이제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2차원의 세계는 종말을 고하는가. 그러나 그 직전, 더 크고 더 본질적인 선언이 인류의 각성을 촉구했다. 볼셰비키혁명. 민족자결주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태양이 저물고 있으니, 자본의 석양(夕陽)이 공산의 미명(未明)으로 이어지기 전에 신대륙이 패권을 접수하겠다는 대전략이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라는 3차원의 세계가 열렸다. 어떻든, 변화는 불가피해 보였다. 일본은 자본주의 블록 안에 있다. 민족자결의 캐치프레이즈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더라도, 무단통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움직인 건 종교계와 자산가 쪽이었다. 그들은 대세를 빌려 독립을 청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기미년(己未年) 3월에 용솟음친 민족의 기상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바스티유로 진군한 상퀼로트와 미라보가 한 몸이 아니었듯이, 혁명의 출발이란 원래 이런 법이다.

◆두암(斗庵) 전협(全協)
고종은 독살되었다. 김위현 교수의 전문(傳聞)에 따르면, 일제에 매수된 시녀들이 감기약에 청산가리를 넣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뒤 세계질서 재편을 논의할 파리강화회의에 헤이그 때처럼 밀사를 보낼까 두려워했던 거다. 고종의 죽음은 상반된 방향에서 주저앉았던 동농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군신의 의리라는 속박에서 풀어준 열쇠였고, 일제와 싸우라는 채찍이었다.
33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작위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심지어 박영효에게도 참여를 권유했다. 왜 동농을 빼놓았을까. 그 이유를 밝혀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3인이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고, 기미년 만세운동이 민중운동으로 타오르던 4월 어느 날, 낯선 사내 한 명이 동농을 찾아왔다. 그 사람의 이름은 두암(斗庵) 전협(全協)이었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의 딸이었다. 동농은 아관파천 때 고종을 호위한 공으로 공조판서에 올랐던 정주영의 부친과 가까웠다. 사돈 정씨댁은 양대 판서댁이라 불린 갑부 집안이었는데, 며느리의 큰오빠 정두화(鄭斗和)는 전협을 도와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있었다. 정두화와 함께 동농 앞에 나타난 전협이 입을 열었다.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주십시오.”
“이 늙은이가 그럴 자격이 있겠소?”
“대감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를 이끌겠습니까?”
“복벽(復辟)은 불가하오. 이제 민국의 시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뜻입니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내 손을 잡아주시오.”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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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동단 선언문]


전협·최익환 주축 1919년 4월 결성 항일 비밀 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불붙던 4월 초 결성되었다. 두암(斗庵) 전협(全協), 역전(力田) 최익환(崔益煥), 권태석, 권헌복, 정남용 등이 주축이었으며, 동농 김가진이 총재를 맡았다.
대동단 명칭은 최익환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동단은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조직을 지향했다. 단원을 황족․진신단․유림단․종교단․교육단․청년단․군인단․상인단․노동단․부인단․지방구역 등 11개 지단으로 나누고, 각각의 조직책을 “총대(總代)”라고 불렀다.
대동단은 결성 직후인 4월, 조선민족대동단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진정서>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5월에는 <선언서>를 발표해,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의 자유발전을 광파할 것” 등 3대 강령을 제시했다.
1919년 11월 28일, 당시 음력으로 기념하던 개천절, 대동단은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나섰다. 대동단 독립선언서는 동농이 기초했으며, 동농과 의친왕 이강 등 33인이 서명했다. 이것이 1919년의 네 번째 독립선언이다. 이강의 망명 실패와 이 시위의 여파로 단장 전협, 최익환 등 주요간부와 조직원들이 체포돼 대동단의 국내조직은 붕괴되자, 대동단 본부는 상하이로 옮겼고, 동농이 이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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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교수]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의 저자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동농의 독립운동은 멸족을 각오한 일”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사진)는 구한말 정치외교사의 이면을 파헤치고, 민중운동의 맥락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선구적 학자다. 그가 1982년에 쓴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은 갑오농민전쟁 연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24권에 달하는 <한말 외국인 기록>을 번역해 펴냈으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시청자에게 널리 알려진 맥켄지(F. McKenzie)의 <대한제국의 비극>을 처음 소개했다. 신복룡 교수는 대동단 주역의 한 분인 역전(力田) 최익환(崔益煥)의 사위이기도 하다.

- 대동단은 3·1운동 뒤에 결성됐습니다.
3․1운동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체념해요. 그 순간에, 국내에서는 대동단이 유일했어요. 당시 국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입니다.
- 대동단 규모가 대단했군요.
13도 대표를 모으자고 했으니까요. 자금 동원만 보더라도. 정두화, 권태석, 부채표 활명수로 그때부터 유명했던 동화약국의 민강, 그리고 호남 지주들이 도왔지요.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따르면, 정두화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3만원을 내놓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 조성환, 박찬익 등 임정 요인들에게도 독립자금을 댔다고 한다)
- 대동단은 상하이 임시정부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인정했습니다. 인정했으니까, 자금을 모아서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을 했지요. 연통제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농이 상하이로 망명한 것도 대동단 총재 자격으로 간 거지요. 임시정부에 보탬이 되라는 뜻으로.
- 동농은 전 대신이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에서 양반이 가문과 혈연을 넘은 경우가 몇 없어요. 대신의 자식이 독립운동을 한 사례는 동농의 아들 김의한이 유일합니다. 그런 점에서 동농 집안은 대단한 거지요.
- 동농의 선택은 정말 파격적이었네요.
그렇지요. 목숨 걸고 한 거지요. 그 시대에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한 사람이 몇 안 돼요. 임시정부를 찾아갈 생각을 한다는 건, 불령선인으로 몰리고, 멸족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안동 김씨인데 말이에요. 자기가 어떤 보복을 당하리라 몰랐겠습니까?
- 수작(受爵) 문제가 서훈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게 동농의 생애에서 치명적인 부분인데요. 수작했다고 그러는데, 내가 직접 받은 적은 없다는 거잖아요? 동농의 경우에는 이미 민족주의자가 됐어요. (망명과 임시정부 합류는 작위 거절이나 반납 같은 소극적인 저항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므로) 수작 문제가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지 않겠는가. 소위 은사금도 받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 개화운동은 왜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개화파가 힘을 잃은 거는요, 우민(愚民)의 논리 때문에 그랬어요. 저것들은 우리가 부르면 따라올 거야. 이게 민중적 지지를 스스로 걷어찬 겁니다. 박영효가 미국을 떠나면서 한 소리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이자들은 양반도 몰러, 이런단 말이에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지요. 갑신정변도 따지고 보면 ‘근왕혁명’입니다. 대원군 친인척, 민씨, 안동 김씨, 홍씨, 조씨, 모두 그 기득권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신복룡 교수는 도쿄의 고서점에서 구한 고서(古書) 한 권을 보여주었다. 센다이 번사(藩士)가 쓴 책으로, 일본은 바다로부터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서 조선을 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정한론의 원조인 셈인데, 출판연도가 1786년이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이 생각났다.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징비록>을 간행한 건 서애가 죽은 지 40년이 지난 1647년. 일본 교토의 한 출판사가 번역본을 초간(初刊)도 아니고 중간(重刊)한 게 1695년인데, 우리말 번역본은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내 출판되지 않았다. 조선은 자기 역사에서 배우려 하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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