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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주최로 상하이에서 열린 3·1운동 2주년 기념식. 단상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 동농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동단은 명망가 중심의 조직들과는 결이 달랐다. 김위현 교수는 “대동단은 특이하게도 아래로부터 쌓아 올린 조직이었다”고 썼다. 단장 전협의 경력이 대표하듯이, 대동단 단원들은 거친 삶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대담한 행동력, 엄정한 규율 그리고 일제의 고문과 회유에도 뜻을 꺾지 않는 투철한 항일의식. 대동단은 출발부터 치열한 전투조직이었고, 그 점에서 독립군과 닮았다.
기미년의 만세운동은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 중국과 미주(美洲)의 망명 지사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되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그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신규식은 대한협회의 동지였고, 간도의 김좌진은 집안의 같은 항렬이자 기호흥학회의 열성 회원이었다. 1919년 5월 20일, 대동단은 “완전한 독립정부를 성립할 때까지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를 원조하고 국민사무를 처리할 것”이라는 <결의>를 채택, 임시정부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동농과 전협은 기획과 선전(宣傳) 파트를 상하이로 옮기려 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핵심역량인 최익환 등이 붙잡혔다. 이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일제는 대동단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대동단은 비밀인쇄소를 재건하고, 기관지 <대동신보>를 제작해 고종 생일인 음력 7월 15일에 배포하며, 일제에 대한 타격을 이어갔다.
조직은 추슬렀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긴 어려웠다. 동농은 망명을 결심했다.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해 임시정부와 합세하고, 지속적인 항전을 모색하자. 전협은 국내의 항쟁은 자신에게 맡기라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동농의 망명에는 또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탈출이었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을 뚫고
동농은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는, “이 정부야말로 진정한 한인(韓人)의 정부다. 반드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한홍구, <김가진평전>). 이때 그는 일흔넷의 노인이었다. 생의 끝자락에서, 청년도 실행하기 힘든 결단을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치욕을 씻고 떳떳이 죽겠다는 각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농은 순간적인 욕망이나 감상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 공적인 삶을 살았다. 주군이 비명에 감으로써 은원(恩怨)은 풀렸으니, 이제 제국의 대신이 누울 자리를 찾는다면, 그곳은 민국이어야만 했다. 비록 단 한 명에 그칠지언정, 그래야만 했다. 못난 주군을 대신해 동포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라도, 부역한 양반들이 훗날 조선을 대표하는 역사의 반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국은 민국과 만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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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임금도 망하고 사직도 기울어졌는데
부끄러움 안고 여태 살았구나.
늙은 이 몸이지만 아직도 하늘을 뚫을 뜻이 남아
단숨에 높이 날아 만 리 길을 떠나가네.
민국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보랴.
천라지망 경계망을 귀신같이 벗어났네.
누가 알아보랴 삼등객실 안에
누더기 걸친 이 늙은이가 옛적의 대신인 것을.
(<동농시록>,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재인용)
◆동농, 의친왕과 함께 망명하려 했다
동농은 열차 안에서 시 두 수를 남겼다. 안동에 도착한 동농 부자가 아일랜드 출신으로 이륭양행(怡隆洋行)이란 회사를 경영하며 임시정부를 돕던 조지 쇼(George Shaw)가 마련한 배에 올라 상하이로 향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전협의 지휘로 의친왕 이강의 탈출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동농과 이강이 함께 떠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사돈을 맺자고 약속할 만큼 뜻이 맞는 사이였다. 동농은 이강을 설득하는 한편, 꺼져가는 만세운동의 불길을 다시 지필 독립선언을 기초했다. 기미년의 네 번째 독립선언이 될 대동단 독립선언. 역시 33인으로 압축한 민족대표에는 이강이 제일 먼저 서명했으며, 여성과 청년이 다수 이름을 올렸다.
대동단은 이강이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면, 개천절인 11월 25일에 맞춰(당시 개천절은 음력으로 기념했다) 대대적인 시위에 나설 계획이었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하지만 왕족을 망명시키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들었다. 결행 날짜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전협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강은 11월 11일 오전 안동역에서, 낌새를 눈치채고 쫓아온 왜경에게 붙들렸다. 곧바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착수한 일제는 전협을 비롯한 대동단 핵심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남은 역량이 개천절 거사를 강행했으나 산발적 시위에 그쳤다. 왜놈의 법정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검사 : 그대는 끝까지 조선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정규식 : 나는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것만 말하겠다.
검사 : 그러면 <선언서>에 실린 것과 같이 마침내는 혈전(血戰) 또한 마다하지 않겠다는 건가?
정규식 : 그렇다. 조선민족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이 있는 한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하여 죽음 또한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신복룡, <대동단실기>, p183)
◆“나는 우리 정부가 있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바라는 바로다”
의친왕의 탈출 실패와 동농의 상하이 도착은 국제적 뉴스가 되었다. 중국 <時事新報>는 “한국의 큰 원로가 상하이에 왔다(韓大老來滬)”는 제목으로 동농의 망명을 전했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중국 신문을 인용해 “쿠리로 변장한 조선의 전 대신 김가진이 30리 이상의 늪지를 걸어서 횡단, 상하이로 왔다”고 보도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놀란 일제는 역선전을 펼쳤다. 임시정부를 일부 평민들의 작당일 뿐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불가능해지자, 엉뚱하게도 동농이 의친왕을 납치해 임시정부 수령에 앉히려 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강이 붙들릴 때 “나는 한국국민의 한 사람이고,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귀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힌 사실을, 일제는 숨겼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동농의 입을 빌려 일제의 모략을 폭로했다. 동농은 의친왕이 자발적으로 망명을 선택했으며, 임시정부에서 전하를 초청했다거나 전하를 임시정부 수령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랐다(<독립신문> 1919년 12월 25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나는 이곳에 우리 민족의 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노라. 나는 우리 정부가 있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바라는 바로다.”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에 실린 동농의 상하이 도착 일성(一聲). 이것이 동농의 진심이었다.
다음 해 3월 1일,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올림픽대극장에서 열린 3․1절 2주년 기념식. 이동휘 국무총리를 선두로 임정 요인들이 입장했다. 상하이 거류 대한민단 단장 여운형(呂運亨)이 개식을 선언하자, 참석한 동포 700여 명이 애국가를 제창하는 가운데, 대형 태극기가 올라갔다. 줄을 당긴 이는 동농 김가진과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독립신문>은 이날 기념식을 다룬 기사에서, 이 두 어른에게 “국로(國老)”라는 존칭을 바쳤다.
“애국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태극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태극기의 끝이 보이고 곧 궤가 보이고 태극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애국가 소리는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는 모든 사람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 이동휘 국무총리는 ‘우리는 이 국기 하에서 금년에는 혈전을 단행하기를 작정합시다’라고 외쳤다. …… 망국의 치욕을 안고 살던 제국의 대신은 이제 민국의 원로로 거듭나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애국가를 부르고 원수 일본에 대한 혈전을 다짐했다.” (한홍구, <김가진평전>)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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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작위’ 받은 동농
어떻게 봐야 하나
‘독립운동 투신’의 진심 살펴야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소위 ‘조선귀족령’에 따라 모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이때 동농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 연재 인터뷰에 응한 김위현, 신복룡, 한홍구 세 분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수작(受爵)한 이들을 한 무리로 보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부역의 대가로 받은 게 명백하지만, 동농이나 김윤식 등은 사실 애매한 지점이 있다.
신동준은 <한국사 인물 탐험> 김가진 편에서, 김윤식이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남긴 해명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동농은) 김윤식의 술회에서 보듯 ‘과인은 이미 작위를 받았음에도 경이 이를 받지 않으니 심히 불안하다’는 군명(君命) 앞에서 더 큰 고민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작위를 거부한 이들도 있다. 김가진의 족형(族兄)인 김석진(金奭鎭)은 음독자결 했고, 대원군의 사위 조정구(趙鼎九)와 조경호(趙慶鎬),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갑오개혁의 주역 유길준, 그리고 민영달(閔泳達), 윤용구(尹用求), 홍순형(洪淳馨) 등 모두 8명이 작위를 받지 않았다. 이들과 비교하면, 동농의 수작은 과연 떳떳하지 못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수작 거절이 곧 민족의 편에 섰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결한 김석진, 우당 이회영과 고종 망명을 도모했다는 조정구를 제외하면, 나머지 여섯 명은 독립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한규설조차도 33인의 동참 제의에 고개를 돌렸고, 민영달은 임정 자금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정정화, <장강일기>). 오히려 김윤식과 이용직이 3․1운동 직후 조선독립을 청원했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작위를 박탈당했다.
동농은 1910년대 초반부터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음에도, 은사금 받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총독부 고위층과 모르는 사이도 아닌 터에, 그가 적극적으로 협조 의사를 밝혔던들 백운장을 빼앗겼을까. 그의 체부동 집은 조선민족대동단의 산실(産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쯤이면, 작위 따위는 차라리 왜경을 따돌리는 구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당신의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개관논정(蓋棺論定)”, 즉 한 인간의 삶의 가치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옛말을 인용하며, 시아버지에게 서훈을 미루는 정부에 섭섭함을 표시했다. 임시정부가 “국로(國老)”라고 받든 큰 어른에게 수작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안이함을 넘어 실로 무례한 형식논리다.
임시정부는 동농을 친일파로 여기기는커녕, 한홍구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민국의 원훈(元勳)으로 모셨다.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듯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다. 그 나라가 27년 임시정부 역사상 단 한 명이었던 정부 고문으로서,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동농에게 서훈을 주저하다니 어찌 된 노릇인가. 설마 임정의 법통을 거역할 심산은 아닐 터이니, 비록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진정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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