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 싸움은 비핵화의 모델까지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작년 6월 1차 북·미정상회담을 전후해서 북한의 경제발전 잠재력을 베트남에 비유해왔다. 그러면서 일명 ‘베트남모델’이 북한의 비핵화와 경제발전의 함수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개혁개방 초기부터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을 뒤따를 것을 종용해왔다. 결과적으로 두 모델의 공통분모는 ‘개혁개방’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이 두 나라가 왜 서로 각기 다른 모델을 주장하는지 그 차이점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모델의 정치경제학적 함의가 서로 같은 결과로 귀결되지만 서로 다른 방법과 경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미·중 양국이 서로 북한에 더 적합한 방법과 경로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미·중의 전략적 이익에 더 부합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단순히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원하지 않는다. 개혁개방의 북한이 자신에게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포석을 미리 두고 싶어 하는 저의가 복선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포석을 이해하기 위해 베트남모델과 중국모델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두 모델 목표의 전제부터가 다르다. 베트남의 개혁이라고 알려진 ‘도이모이(Doi Moi)정책’은 경제구조와 시스템의 개혁을 위해 단행된 것이다. ‘도이모이’의 뜻이 혁신(renovation)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개방을 전제로 한 혁신이 아니었다. 베트남은 50년대부터 중국과의 국경전쟁이 끝나 1979년까지 전쟁을 거의 반세기 동안 치렀다. 그러면서 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1986년 12월 제6차 베트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정책이 채택될 당시 베트남의 인플레이션은 780%를 기록했다. 소련의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80년대 소련의 지원과 원조도 급감했다. 중국의 원조와 경제적 지원도 베트남전쟁 종결과 국경전쟁으로 중단되었다. 50여 년 독립전쟁, 공산혁명과 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경제와 산업 기반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베트남 경제는 고립되어갔고 위기는 심각해졌다. 극심한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베트남공산당의 중앙상임위원회가 운명적 결단을 내린 게 경제개혁이다. 당시 인구 6000만 인구의 베트남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차 3중전회에서 결의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개방을 전제로 개혁을 결정한 것이었다. 즉, 대외 개방을 수반하기 위한 국내제도 개혁을 병행하는 정책 결정이었다. 그 결과 개방 조치와 제도 개혁이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경제특구’의 설정과 제도 개혁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채택 배경도 베트남과 유사한 경제 상황 때문이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부터 1978년 개혁개방 채택 이전까지 약 100년의 전쟁, 마오쩌둥 시기에 지속된 계급투쟁과 계획경제의 실패로 경제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중국으로서는 당시 9억5000만명의 경제생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럼 미국과 중국은 왜 서로 각기 다른 모델이 북한에 적합하다고 주장하나. 북한의 대내외 경제 상황은 베트남과 중국과 모두 비슷하다. 고립되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내부적으로 경제체제와 시스템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관건은 북한의 개방 여부 의지다. 베트남은 개혁과 동시에 개방을 추구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경우 개방은 인력(인재), 자본과 기술력 등이 결핍된 상황에서 해외에서 유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한 결과였다. 매우 점진적이었고 주변국가가 우선 대상이었다. 중국경제의 상황 역시 같았지만 규모 상 현격한 차이가 개방의 동시 추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개방을 김씨 정권의 존립 문제로 인식하면서 두려워한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에게 지난 40년 동안 세계에 개방하라는 의미의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중국이 의미하는 개방은 자신에 대한 개방이고 이는 행동으로도 보였다. 북·중 간의 마지막 경협 논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한 황금평·위화도의 개발 사업은 중국에 대한 북한의 개방이 핵심이었다. 두 나라의 경협 논의가 실패로 계속 이어진 사실은 북한이 중국에게마저도 개방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방증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대북 개혁개방 설득이 상당한 고초를 겪고 있다.
북한이 당면한 두려움은 비단 정권의 존립 여부가 아니다. 과연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통해 자신의 정권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보를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강하다. 다시 말해, 미국과의 불신이 문제라는 의미다. 비핵화로 개혁개방을 한들 북한의 정권과 국가의 안보를 보장하는 최선의 보장 장치는 미국과의 수교다. 이는 베트남과 중국의 경우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두 나라는 아직까지 공산주의 실현 목표와 사회주의 방식을 견지하는 한 자신의 공산정권이 미국의 전복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미국과의 수교를 안보보장의 전제라고 가정하면 북한은 베트남이나 중국의 수교과정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1969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결정을 한 후 개혁개방과 수교를 동시에 일궈냈다. 1978년 12월에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이듬해 1월 1일 미국과 수교했다. 베트남의 경우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포로 문제 해결을 위한 당근책으로 1977년에 수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고 도이모이가 채택된 3년 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 철수를 단행하면서 1991년부터 관계정상화 논의가 시작됐다. 1995년에 미국과 베트남은 수교한다.
결국 중국은 개혁개방 이전 10년 동안 미국과 수교문제를 협의했다. 베트남은 실질적으로 수교 협상 5년 만에, 그러나 도이모이 채택 이후 10년 만에 미국과 수교할 수 있었다. 북한에게 던져진 주사위는 결국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하고 미국과의 수교를 차후 협상하는 베트남식 모델이냐, 아니면 수교를 사전협의해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동시에 발표하는 중국식 모델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북미 간의 신뢰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이제 모든 결정은 북한의 의지와 용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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