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한글이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민족은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가운데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도 국어학자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말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이번 전시는 조명한다.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대표적인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는 1930년대 한 음식점 방명록인 금서집(외솔기념관 소장)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친필을 남겨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지키려 했던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을 지낸 이극로(1893~1978)는 한글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해 ‘물불’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 ‘고투사십년’에는 이러한 고투 과정이 담겨 있다.
1446년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언제부터 ‘한글’로 불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글’이라는 명칭은 ‘한글모죽보기’에 기록된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꿨다는 설명에 처음 등장한다. ‘한글모죽보기’에서 ‘모’는 모임, ‘죽보기’는 여러 내용을 한번에 죽 훑어볼 수 있게 만든 책이라는 의미로 국어학자 이규영(1890~1920)이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언문회는 1911년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에 ‘한글모’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1920년대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민중을 자각시키려는 목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돼 한글보급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조선어학회도 한글 보급을 위해 강습회를 주최하며 언론사와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의미의 러시아어로 19세기 후반 러시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펼친 계몽운동을 브나로드 운동으로 지칭한 것에서 비롯됐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감옥에서 사망한 이윤재(1888~1943)는 한글 교재인 ‘한글공부’를 제작해 동아일보와 함께 학생계몽대를 조직해 한글을 보급했다. 당시에 문맹을 ‘글장님’으로 지칭하고 글장님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던 사실은 ‘동아일보’ 등에 실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글 강습회가 성황을 이루자 1933년 조선총독부는 한글 강습회를 중단시켰고 1935년부터는 전면 금지시켰다.
한글이 근대적인 문자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통일된 표기 체계가 필요했던 가운데 1894년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된 후 표기법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학부 내에 한글 연구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돼 주시경(1876~1914) 등 연구위원들이 한글표기법통일안인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했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표기법 통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맞춤법 통일을 시도했으나 시행에 한계가 있었던 반면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우리 손으로 맞춤법을 통일하려 했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완성됐고 민족진영, 사회주의계열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에서 지지를 선언하는 등 맞춤법의 통일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향한 민족의 단결을 이루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전시실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다양한 교과서를 비롯해 광복 이후부터 7차 교육과정까지 편찬된 국어 교과서를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88년의 국어 교과서에서 ‘나’와 ‘어머니’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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