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는 100년 전인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승하 직후, 고종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나라를 잃고 억눌려 왔던 사람들의 울분을 폭발시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다.
역사학자들은 독살설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일제가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을 4일 앞두고 굳이 독살할 이유가 없었다는 논리다. 이 결혼은 미뤄져 1년 뒤에 이뤄진다.
고종 황제의 국장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했다. 기존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장례 절차인 국장은 임시기구인도감의 주도 아래 승하한 후 발인을 거쳐 왕의 관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서 70단계에 달하는 절차를 3년에 걸쳐 진행했으나 고종 황에 장례는 총독부가 설치한 장의괘가 주도하고 대부분 절차가 축소, 변형됐고 장례 기간도 단축됐다. 또 조선 국왕의 국장이 아닌 일본 천왕의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조선의 옛 관습을 더한다는 원칙으로 진행돼 일본 신도식 의례가 적용됐다. 이러한 변형과 왜곡은 일본 식민 통치의 현실을 드러냈다. 고종 황제의 국장은 500년 조선왕조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발인을 보기 위해 상경한 지방민이 40만명에 달했다.
고종의 국장이 조선 국왕의 국장과 달랐던 점은 왕의 관을 실은 대여 행렬과 왕의 혼백을 상징하는 신주를 모신 신연 행렬이 나뉘어 이동했다는 점이다. 대여 행렬은 훈련원에 설치된 국장식장으로 향하고 신연 행렬은 별도로 홍인지문 밖에서 기다려 국장식을 마치고 나온 대여 행렬과 합류해 남양주의 홍를까지 이동했다. 고종의 관은 승하 40일만에 덕수궁에서 발인했다.
고종은 홍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에 입적하여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1895년에는 왕비가 일본인에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등을 겪은 가운데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고종은 주권 강탈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실패하고 1907년 퇴위당하고 말년을 덕수궁에서 거처했다.
‘고종의 승하’, ‘고종의 국장’, ‘고종의 영면’ 등 총 3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국장 때 촬영된 당시 사진과 의궤 등에 남겨진 기록,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의 사진 등 총 15건의 작품이 소개된다. ‘순종황제실록 부록’, ‘영친왕비 일기’와 같은 기록은 고종 황제의 승하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태왕전하어장주감의궤(고종 황제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 ‘덕수궁인산봉도회등록(고종 황제의 국장 때 대여를 맨 민간단체의 기록) 등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고종 황제의 국장이 일본식으로 진행되면서 기존 국왕의 국장에 비하여 절차가 축소되고 변형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함께 전시되는 두 건의 ‘고종 황제 국장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들은 국장의 진행 과정과 그 의미를 시각적으로 선보인다. 이외에도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제작된 어보와 옥책으로 여전히 남아 있던 당시 왕실 의례의 면모도 선보인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함께 잠든 남양주 홍릉의 사진과 기록도 전시해 대한제국 황제릉의 성격과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능으로서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홍릉의 능제와 의미를 소개한다.
21일에는 이번 전시와 연계한 특별 학술강연회가 ‘고종 국장과 1919년의 사회’라는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개최된다. 강연은 두 가지 주제로 제1강연에서는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고종황제의 국장 과정을 분석해 대한제국 황실 의례가 국권피탈 이후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2강연에서는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고종 국장으로 인한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권피탈 후 억눌린 민족의 한이 3.1운동으로 폭발하는 과정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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