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의 영웅'이라 불리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 대통령 집권(1999.02 ~ 2013.03) 당시 베네수엘라의 기세는 의기양양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 반기를 들고 막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무상 복지 정책과 부(富)의 재분배를 밀어붙이던 카리스마 넘치는 열정적인 지도자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는 2002년 4월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지만 그를 지지하는 국민의 시위로 이틀 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가 깊고 깊은 '수렁'에 빠져 들고 있다. 경제 파탄에 300만 명이 넘는 '국민 엑소더스' 그리고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시간'만이 알고 있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국제사회의 퇴진 압력에도 불구하고, 차베스의 좌파 포퓰리스트 '유훈통치'를 이어가는 니콜라스 마두로(56) 대통령은 끈질기게 자리를 버티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절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두려움과 긴장감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아직도 과거 무상복지 정책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는 차베스타(chavista:차베스의 지지자) 들이 많다. 이들은 지난 1월 23일 자신을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35) 국회의장이 주도하는 마두로 퇴진 시위에 맞불을 놓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50여 개 국가가 과이도 의장을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과이도에 대한 국내 지지 세력도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마두로 정권은 그리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미국이 군사개입이라는 극히 '위험한' 옵션 사용을 배제한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마두로에겐 차베스타와 함께 또 하나의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군(軍)이다. 현재 마두로 정권으로부터 군을 분리 시키는 일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그의 군대 조직은 이해 관계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 직업 군인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개념의 군 조직이 있고, 쿠바의 군사 정보원들과 손잡고 반정부 인사를 추적하는 이념적 성향의 군인들, 그리고 국영기업체 주요 자리를 꿰찬 군 장성 그룹, 마약 등 불법 거래를 통해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군인들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여기다가 무시무시한 2개의 '살인 요원' 조직도 존재한다. 하나는 2017년 창설된 특수행동부대(FAES)이다. 원래 범죄 소탕을 위해 조직되었으나, 은밀한 곳에서 정치적 동기의 살인을 자행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콜레티보(Coletivo)'로 불리는 민병대원이 있다. 이들은 검은 복면을 쓰고 오토바이를 몰며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기도 하는 마두로 지지 폭력배 세력이다. 조직원은 대부분이 죄수 출신과 깡패들로, 이들이 있기에 마두로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정규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독재 정권이라고 하지만 군 조직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형태는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다. 차베스와 달리 군 출신이 아닌 마두로는 집권 후 정권 유지를 위해 군을 돈으로 회유해 사조직화 했다. 또 군을 일사불란한 하나의 조직이 아닌 여러 조각으로 갈라 놓아 군과 장성들이 단결된 행동에 나서기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이도 국회의장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군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설상 과이도 국회의장이 반정부 투쟁이나 미국 등 외세 개입을 통해 집권하더라도, 군 조직을 정상화하는 과정은 베네수엘라 민주화 과정의 가장 큰 암초임에 틀림없다. 과이도 국회의장은 지난달 31일 뉴욕타임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비밀리에 군부 지도자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를 변화시키려면 마두로 정권에 대한 군부의 지지 철회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가 군의 마음을 얻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차베스는 자신의 꿈인 '베네수엘라식 사회주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2013년 암 투병 끝에 사망하기 전 버스 운전기사이자 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부통령에 오른 마두로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마두로의 집권 이후 계속된 부정부패, 그리고 이를 덮기 위한 퍼주기식 '포퓰리즘'으로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른다. 차베스 집권 시에는 높은 유가를 바탕으로 포퓰리즘 정책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1998년 49%에서 2012년에 25%까지 감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가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각종 무상복지 정책은 정부 재정을 고갈 시켰다. 현재의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적자재정을 자국 화폐를 발행하여 메꾸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현지시간) 마두로는 자신의 정치적 멘토 차베스의 사망 6주기 행사에서 "미친 소수 세력들이 계속 분노를 퍼뜨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며 "차베스를 위해 그리고 위대한 역사를 위해 그들을 분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차베스를 '위대한 혁명가'가 아닌 나라를 경제 위기에 몰아넣은 사람으로 비난하는 反차베스 세력이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국민 80%가 지난 6년간 집권한 마두로에 대해 분노하고 실망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국제 사회도 분열시키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쿠바, 이란, 터키, 시리아 등은 미국과 서방 국가의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한 개입 중단을 요구하며 마두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마두로의 공개 축출에 앞장서고 있는 미 행정부는 현재 군사 개입보다는 경제 제재 카드를 휘두르며 그의 자진 사퇴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위기를 중남미에서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앞마당'인 남미로의 진출을 강화하기 위해 차베스 집권 시절부터 베네수엘라에 공을 들이며 65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악화되면서, 이 중 상당 부분이 미 상환 상태이다. 베네수엘라에 발목이 잡힌 중국은 하루하루 트럼프 행정부의 對베네수엘라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바람 속의 촛불' 같은 베네수엘라의 운명이 다시 복잡한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 빠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독재자를 몰아내고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3200만 베네수엘라 국민 자신들이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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