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닷물 같아/먹으면 먹을수록/더 목마르다고/이백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 마지막 가을/앙드레 코스톨라니가/93세로 세상을 떠났다/돈, 뜨겁게 사랑하고/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광화문 네거리에서/삼팔육 친구를 만났다./한잔 가볍게/목을 축인 그가/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주머니가 가벼우니/X도 마음이 무겁군
고두현의 '돈'
귀인은 귀인인데, 음산한 귀인이다. 여의도에서 소문이 무성한 전설의 작전꾼, 이름도 성도 몰라 모두들 그를 그저 '번호표'라고 부른다. 그가 베팅했다 하면 어김없이 대박을 치는지라 브로커들에겐 번호표 받고 줄 서서 그와 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바로 그남자가, 이 희망 없는 신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쓰기 좋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 가난한 시골친구는 단 한번 거래로 7억을 벌었다. 영화를 보는 많은 눈에선 '감정이입'의 광채가 잠깐 일었을지 모른다. 내 통장에 갑자기 7억이 꽂힌 상황. 6억짜리 반전세 주택에 입주해 넓디넓은 거실과 명품 주방과 가구들, 탁 트인 뷰를 스캔하는 기분. 이 남자의 행운을 계속 따라다니는 것만 해도 힐링이 된다. 뒷골을 때리는 '위험의 규모'가 자꾸 커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거야 뒤에 가서 고민하자.
10억이면 1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냐고 물었을 때, 별로 세어볼 일 없는 숫자라 즉답이 안 나오는 많은 이들에게, 큰 돈을 만진 청년은 말한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난 부자가 되고 싶었다고.
언론인이기도 한 시인 고두현은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돈에 대한 인간의 갈망 연대기를 시로 썼지만 철학적인 멘트가 허기를 메워주는 것은 아니다.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손갈퀴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줄기 같은 돈,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천국의 완전체'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그만큼 현실바닥을 더욱 차갑고 팍팍하게 하는 애물단지가 어디 있는가.
재테크란 세련된 이름을 덮어쓰고 있는 것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만들어준 생존술의 핵심일지 모른다. 대박이란 거친 이름을 덮어쓰고 있는 것들은 그 생존술의 본심 같은 것일지 모른다. '돈'이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트랜스포머나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더 무섭게 115분을 '시간순삭'하는 것은 우리 속에 이미 저 무한탐욕의 괴물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일까. 취업자 대열에 끼지 못한 청년들, 그 대열에서 너무 일찍 내쫓긴 중장년들, 손님들 다 떨어진 텅빈 상가들에서 한숨 짓는 자영업자들. 있는 자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곡예로 한껏 더 벌어들여 이미 '돈 세상'을 더 돌게 하니, 시도 영화도 현실을 뺨치긴 어렵다.
이빈섬(시인·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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