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검 그것 외에 가진 거 없는 이는
좀체 칼을 뽑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도
사랑한다는 마음의 진검을
평생 동안 아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날에 서로
알고 있었다
김남조의 '진검'
■ 오래전 서대문의 검도장 '세검관(洗劍館)'에서 미친 듯 목검으로 내리치며 머리, 허리를 부르짖을 때, 사부님은 말했다. 그건 칼이야. 진검이라고 생각해. 칼은 스스로 죽음을 가지고 있다. 몸속 깊이 파묻혀 목숨을 끊어야 할 칼끝을 가지고 있다. 칼이 칼을 만나는 것. 그는 그걸 진검승부라 했다. 내 칼은 상대의 죽음이요, 상대의 칼은 나의 죽음이다. 진검승부에는 이미 나의 죽음이 상대 칼끝에 새겨져 있고, 상대의 죽음이 내 칼끝에 예언되어 있다. 검객은 결국 칼에 죽는다.
검객이 칼을 아끼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고, 그 목숨이 끝맺어야 할 명분을 고르는 데 신중한 것이다. 칼을 섣불리 뽑는 것은 제 목을 치는 행위와도 같다. 사부님이 진검이라고 말할 때, 그 칼날에 은빛이 쨍하고 빛났다. 진검승부라고 말할 때 그 칼날에 피가 흘렀다. 진검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가 용납되는 것은 칼이 아니다. 실수는 죽음이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칼은 완전한 움직임이어야 한다. 완전하지 않으면 뽑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게 언제고 '사랑해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 조르기까지 했다. 그는 고개를 흔든 뒤 말한다. 그건 일생에 한번 말하는 것. 목숨을 걸고 칼을 뽑듯. 칼집에 칼을 넣어둔 채 침묵으로 사랑의 전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한번도 뽑지 않을지라도, 그녀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말을 이토록 무겁고 어렵게 쓴 때가 있었다.
이 시는 진검의 시가 아니라, 칼집의 시다. 칼집 속에 들어가 있는 채, 사유하고 고민하고 심화하고 정리하고 변주하고 후회하고 다시 마음으로 빼드는, 그 보이지 않는 심검(心劍). 우리는 마침내 뽑아든 진검의 광휘에 황홀해하지만, 사랑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칼집 속에서 단 한번의 고백을 위해 벼르는 긴긴 침묵이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함부로 설검(舌劍,혀의 칼)을 휘두르는 이에게 이 시를 권한다.
이빈섬 (시인·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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