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진행된 회의는 이튿날인 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계속됐다. 의사일정을 마치고 감격적인 만세삼창을 부르고 해산할 때 회의장인 식당의 동창으로 아침 햇볕이 환하게 비쳤다.”
춘원 이광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1919년 3·1운동에 고무된 상해(上海) 임시의정원 회의에서였다. 조소앙 여운형 이회영 이동녕 등 29명의 애국지사들은 민주공화제(제1조),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통치(제2조), 특권계급 부인과 남녀평등권 보장(제3조), 여러 기본권의 보장(제4조), 선거권과 피선거권(제5조) 등 10개조의 헌장을 채택했다. 이를 이광수가 기사로 작성해 4월 13일 각 언론사에 보냈다. 파리의 김규식에게는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의 신임장을 송부했다. 그렇게 임정(臨政)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 민족도 마침내 근대 민족국가건설(nation-state building)의 대열에 선 것이다.
김희곤 교수(안동대·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는 임정의 역사적 의의를 “우리 민족사에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첫 번째 정부라는 혁명적 사실을 드러냄”에서 찾고 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2004년). 임정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각성(覺醒)이다. 조선왕조 500년 전제군주제가 일제의 병탄(1910년)으로 막을 내린 지 10년이 채 안 되는데 어떻게 민주공화정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공화’라는 개념은 개항기인 1880년대 서구의 입헌군주제와 함께 처음 우리에게 다가온 걸로 돼 있다. 입헌군주제가 군민공치(君民公治)라면 ‘공화’는 국민국가, 국민주권을 향해 한 발 더 나간 것이어서 당시 선각자들도 곧바로 ‘공화’로 가기는 어렵다고들 했다(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이경규 외, 『한국의 근현대, 개념으로 읽다』 2016년). 그런데 공화정이라니! 그 통찰력과 예지(叡智)가 실로 놀랍다. 임정의 주역들도 감격했던 것 같다. 안창호는 이듬해 임정 신년축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대한나라에 황제가 있소? 없소이다. 과거엔 황제가 1인밖에 없었지마는 금일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주권자외다.”
우리 사회 일각에선 임정의 이런 민족사적 의의와 항일 독립투쟁 과정에서의 실질적 기여를 평가하는 데 인색한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제기된 ‘1948년 8월 15일 건국론’이 단적인 예다. 임정은 국가로서 요건인 국토, 인구, 정부, 외교권 등 4대 요소(1933년 몬테비데오 협정)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건국으로 보기 어렵고, 대신 유엔의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 의원은 이날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논란이 되자 이 법안은 철회됐다).
1919년 임정을 건국으로 여겨온 사람들이 거세게 반발한 건 당연했다. 임정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처음 썼을 뿐 아니라, 1948년 제헌헌법에서도 “기미(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명시했고, 현행 헌법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했으므로 임정이 건국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정의 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이며,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명백히 새겨 넣었고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됐다”고 상기했다.
건국절 논란은 표면적으론 소강상태다. 물밑에서 부글거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보다는 한결 차분해졌다. 문 정부는 올해 임정 수립 100주년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지만 이렇다 할 반발도 찾아보기 어렵다. 양측이 마침내 그런 논란은 정답도 없고 실익(實益)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일까.
애초 뉴라이트 계열에서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부터가 너무 나간 거였다. 국제법과 국가실체론을 들고 나왔지만 적실성(適實性)이 떨어졌다. 국가로서의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국가적 실체가 없었다고 임정이 부정될 수는 없는 일이다. 집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고 우리가 조상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가의 영속성으로 보나, 항일투쟁의 상징성으로 보나 임정은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남북관계를 봐서도 그렇다. 앞으로 남북은 임정이라는 큰 우산(雨傘) 아래서 하나가 돼야 한다. 그게 헌법적 당위이기도 하다. 통일됐다고 한반도에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세울 셈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에도 왜 1919년 임정 얘기만 나오면 낯빛이 굳어지는 사람들이 많을까. 역사관이 다른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친일(親日) 콤플렉스가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일 터다. 임정이 거론될수록 친일 논란이 벌어지는 게 두렵거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정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의 주류세력을 바꾸겠다는 숨은 의도도 있다고 의심한다. 집권당 대표가 ‘진보 100년 집권’을 호언하고, 한 의원은 “니들 아버지는 그때 뭐했느냐?”고 눈을 치켜뜨는 분위기라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이 해묵은 논쟁을 이제는 끝낼 때도 됐다. 임정 수립 100년이다. 그동안 친일파도, 임정의 애국지사들도 대개는 세상을 떴다. 그들의 과오와 공은 반드시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와서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겠다고 나설 일인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정부가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려다가 멈춘 것은 잘한 결정이다.
임정의 법통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거 중의 하나가 “1948년 건국을 수용하면 100년 민족국가 건설사를 스스로 위축시켜서, 협소한 공간에 가두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청산(淸算)의 정치도 결국엔 우리 근, 현대사를 그만큼 더 좁아진 공간에 맞추자는 것은 아닌가. 한 지식인은 “(어느 쪽이든) 역사를 미래를 위한 거울로 삼는 게 아니라 현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발상”에 대해 우려한 적이 있다(김성보 연세대 교수, 대학신문 2016년 9월). 동의한다. 나는 임시정부 100년, 그 각성의 역사도 자랑스럽고, 대한민국 정부 71년, 그 성취의 역사도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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