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은 북한의 정치가이자 남침을 주도한 사회주의자인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쪽은 조선의열단을 창단한 김원봉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며 '빨갱이' 프레임을 씌운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개봉한 영화 '암살'과 '밀정'으로 김원봉은 뒤늦게 대중에게 친숙해진 존재입니다.
조선의열단은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합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초대 교장이 바로 김원봉입니다. 1942년에는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귀국했습니다.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김원봉이 세간에 늦게 알려지거나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 행적을 보면 이유가 짐작됩니다.
김원봉은 1946년 느닷없이 민주의원을 탈퇴한 후 남조선민전 공동의장에 취임합니다.
1948년 월북한 후에는 북한 초대내각의 국가검열상으로 선출되더니, 6·25 전쟁시기에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도 활동하기도 합니다. 남침 주도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까닭입니다.
이어 1952년 5월8일 국가검열상에서 로동상으로 임명되고 1958년 3월 17일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에는 '탄생 60주년' 기념으로 '로력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항일운동을 했지만 월북 정치가이기도 한 김원봉.
논란을 의식한 보훈처는 김원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드뭅니다.
특히 국가보훈처의 자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지난 2월 의결 권고안에서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원봉 등 독립유공자로 평가돼야 할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정 서훈을 권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격화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복 74주년의 해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둘로 나뉜 한반도, 그리고 김원봉 서훈 수여를 둘러싸고 나뉜 대한민국, 김원봉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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