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김원봉 드라마 논란 왜? 일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광복 후 월북, 요직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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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환 기자
입력 2019-05-0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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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다룬 MBC 드라마 '이몽'이 첫 방송한 가운데 김원봉에 관심이 쏠린다.

이몽은 김원봉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방송 전부터 논란이 됐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 투쟁에 앞장섰지만, 광복 이후 월북해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18년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하면서 중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2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12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등과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의열단은 만주, 상해, 난징 등을 본거지로 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이 한 일은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투척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1924년 도쿄궁성 폭탄공격 미수 △1926년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등이 있다.

이후 김원봉은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1926년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황푸군관학교 훈련생으로 입소했다.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고,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해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했다. 1944년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 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했지만 여운형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했다.
 

[중국서 독립투쟁 활약 당시의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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