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호 동대문문화재단 대표이사
나에겐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상대에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렇듯 서울과 지방의 문화는 다르다. 19세기 인류학자인 타일러는 문화를 '지식·믿음·예술·도덕·법·관습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이 획득한 기타 능력과 습관을 포함한 복합적 전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부산과 서울의 문화는 다르게 발전해 왔다. 발전과정에 따라 언어·예술생활 방식은 달라진다. 인간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따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동대문구의 문화 역시 서울의 중구, 종로구 문화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 가정마다 차이가 있듯, 문화를 주도하는 문화기관과 문화단체·개인과의 차이 역시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동등하게 적용한 문화 관련 법과 제도이지만 지역의 문화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영향 역시 다르다는 추론에 이른다.
동대문구의 문화를 보자. 필자에게 부산 지인들은 "동대문플라자(DDP)에서 하는 전시도 기획하느냐"고 묻는다. 그러곤 대부분 동대문시장과 동대문(흥인지문)에 관한 옛날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도달하면 동대문(흥인지문)과 동대문종합시장, DDP도 동대문구 관내가 아니라 종로구와 중구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물론 서울 사람들도 행정구역을 아는 사람들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동대문이라고 하면 당연 동대문구에 있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4대문 중 동쪽 문은 성곽의 안팎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왕은 설렁탕의 유래가 된 제기동 선농단에서 곡우(穀雨)에 풍농을 기원하는 선농제를 지내기 위해 이 문으로 나왔고, 퇴직한 공신들에게 보제원(普濟院)에서 상사(上巳)와 중양(重陽)에 기로연(耆老宴)을 열어주기도 했다. 보제원은 지방에서 서울로 밀려드는 빈민을 일시적으로 진휼해 도성 내 진입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하니, 흥인지문은 동쪽 성문의 안과 밖의 굳건한 경계일 수밖에 없었다. 안과 밖의 문화 차이가 생겼다. 흥인지문의 밖은 성 안의 사람들에겐 여유, 놀이, 죽음의 문화가 있는 곳으로 인식됐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버드나무와 복사꽃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삼청동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과 함께 성 밖 놀이터로는 최고였다고 하니 한양의 최고 여유 공간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된다. 사회·역사적 과정에 문화는 형성되지만 그 중심축은 항상 중심권에 있었기에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겐 소외감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한 현실이다.변두리인들의 소외감이 그들의 문화를 만드는 것, 이것이 스토리라는 명제로 통한다는 것이 요즘이다. 이데올로기 논제의 중심보다는 비현실 같은 그들의 이야기가 재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제 중심은 보편화됐고, 변두리는 특수성이 됐다. 이전까지 통용됐던 보편성은 이제 식상하게 느껴졌고, 보편화되지 않은 이질성이 흥미로 돋는 시대, 자신의 인식에서의 이질적인 문화를 선호하는 시대가 됐다.
동대문구에는 동대문, 동대문종합시장, DDP와 같은 브랜드는 없다. 동대문구는 알맹이가 없는 찐빵이다. 그러나 알맹이가 없기에 보기 좋게 부풀어진 공갈빵이 됐다. 공갈, 즉 사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알고 당한 사기는 사기가 아닌 애교가 된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붕어빵을 먹는 이유 역시 맛있기 때문이다. 붕어빵이 맛있는 이유는 붕어를 닮았기 때문이다. 알맹이 대신 역사, 여유, 놀이, 애환을 담았다. 이제 그들의 스토리로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 붕어빵은 붕어를 닮은 외모가 중요하듯 동대문구는 그것만의 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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