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는 오는 19일까지 변월룡 개인전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展을 연다.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변월룡이 러시아와 북한을 오가며 제작한 작품 189점(회화 64점, 판화 71점, 데생 54점)을 학고재 전관에서 선보인다. 변월룡의 개인전을 상업 화랑에서 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5년간 변월룡 연구에 전념해온 문영대 미술평론가가 전시 기획을 총괄했다.
변월룡은 지난 2016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이 개최한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이라는 전시명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 화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뛰어났다. 작품들 앞에서 한참동안 멈춰서 있었다.
그는 러시아 최고 미술 대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미술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고 정교수까지 된 인물이다. 1757년에 설립된 레핀미술대학은 2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변월룡은 6.25전쟁 이후 고국의 모습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북한 미술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폐허와 다름없던 평양미술대학의 학장 및 고문으로 파견되어 교육 체계를 바로잡는 데 힘썼고, 당대 주요 화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사실주의 미술의 탄탄한 기초를 전수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북한에서 숙청 당한 후 1963년 그린 그의 유일한 ‘자화상’은 당시의 고독과 쓸쓸함, 절망을 그대로 전달한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교제하는 것을 즐겼던 변월룡은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해 화가 배운성, 문학수, 정관철 등을 화폭에 담았다.
1945년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린 유화 ‘어머니’(1985)에는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작품 우측 하단 한글로 새겨진 ‘어머니’라는 글자는 작품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다.
변월룡의 동판화는 놀라웠다. 학고재는 “레핀미술대학 교수들은 변월룡의 동판화를 두도 심지어 렘브라트르를 뛰어넘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변월룡은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렘브란트를 꼽았다.
‘바람’(1959) ‘비-버드나무’(1971), ‘블라디보스토크 해변’(1972) 등 역동적인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작품에 한글 서명과 글귀를 적어 넣었고, 평생 한국식 이름을 고수했다. 사후 비석에도 한글 이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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