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최근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유럽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연합 시위를 벌인 직후 한 발언이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선거 하루 전날인 지난 2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포퓰리스트와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와 사랑에 빠져 있다"며 "'유럽의 연대'라는 EU의 주된 목표를 위협한다"고 거들었다.
일련의 발언은 EU 통합을 주도해온 기존 연대 세력의 위기감을 보여준다. 이번 선거는 반(反)난민·반(反)EU 기치를 내세운 극우 성향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꾸준히 지지 기반을 넓히고 있는 가운데 영국이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이후 처음 치른 선거다. 이번 선거는 EU의 분열을 가속화할지,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지, EU의 운명을 가를 중대 분수령으로 주목받았다.
유럽의회가 선거가 모두 끝난 26일(현지시간) 출구조사 결과 등을 반영해 미리 발표한 예상 의석수는 밤 11시56분 현재 전체 751석 가운데 중도 우파 성향 유럽국민당(EPP) 그룹이 178석으로 제1당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는 현재 의석수(217석)보다 39석이나 줄어든 것이다.
다만 EU의 통합 강화를 주장하는 중도 성향의 자유민주당(ADLE) 그룹이 현재(68석)보다 40석 많은 108석으로 제3당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EPP와 S&D가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반EU 공세를 막아내려면 ADLE 그룹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반난민·반EU를 내세운 유럽보수개혁(ECR), 자유·직접민주주의(EFDD), 유럽민족자유(ENF) 등 극우 포퓰리스트 그룹은 모두 169석으로 15석을 늘릴 것으로 예측됐다.
이번 선거에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듯 녹색당(Green) 계열의 선전도 돋보였다. 녹색당 그룹은 현재 의석수(52석)보다 15석 많은 67석을 얻을 전망이다.
◆우파는 왜 반기를 들었나...켜켜이 쌓인 불만
이탈리아 북부동맹,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 독일 극우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 등 유럽 우파·포퓰리즘 정당이 요구하는 것은 EU 개혁이다. 분담금과 난민 정책 등 EU의 주요 정책들이 일방적이며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EU 회원국이 됨으로써 책임과 의무가 늘어난 반면 개별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이 제한된다는 데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1970년 이후 균형 잡힌 예산 집행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사실상 현행 EU 규정에는 새로운 협약을 맺는 데 있어 회원국이 EU 정책을 따르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묻는 조항이 없다. 지난 1993년 현재의 골격을 완성한 이후 개별 국가의 상황에 따라 EU 규정을 따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른바 옵트아웃(Opt-out)이다. 영국과 아일랜드가 솅겐 조약(EU 내에서 비자 없이 자유로운 통행 보장)에 가입하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다만 영국이나 독일 등 강대국에게 옵트아웃과 제재 회피 등의 권리가 쏠려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EU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EU 내 불만이 돌출된 것은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에 들어 EU에 가입하는 중앙유럽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불공평 논란이 일었다. 비교적 저렴한 중앙유럽의 노동력이 기존 회원국인 서유럽 국가로 몰리면서 일자리 경쟁이 촉발된 탓이다. 2009년 11월 EU의 미니 헌법격인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면서 정치적 구속력도 강해졌다. 무엇보다 EU 분열에 불을 지른 것은 독일의 포용적인 난민 정책이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난민이 유럽에 밀려 들어온 지난 2015년 기준 망명을 신청한 공식적인 난민 수만 126만7000여명에 달했다. 지난해에는 약 58만명으로 전년 대비 11% 감소했지만 난민이 EU에 남긴 상흔은 작지 않다. 반(反)난민을 내세우는 극우·포퓰리스트 정당이 대약진하면서 유럽 정치지형을 뒤흔드는 계기가 된 탓이다.
5년에 한 번씩 직접선거를 통해 구성하는 유럽의회는 EU 입법 기관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의회는 물론 유럽중앙은행(ECB) 등 EU 내 주요 그룹의 리더를 선출한다. 가장 관심을 끄는 자리는 EU 집행위원장이다. EU 집행위원장은 EU 행정부 수반 격으로, EU를 대표하는 최고 자리다. EU 회원국들이 자국에서 EU 집행위원장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은 EU에 대한 회원국 국민의 신뢰도를 보여주는 기준으로 통한다. 대규모 투표 행사인 데다 좌·우파 간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번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관건으로 꼽혔다. 2000년대 이후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는 40%대의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유럽의회 선거가 처음 실시된 지난 1979년 투표율이 61.8%였던 점에 비하면 급격한 하락세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51%를 넘어서며 지난 20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 역할에 쏠린 눈...프랑스·영국·독일 동맹에 달린 EU 미래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그동안 EU는 연대 의식을 기반으로 단일시장을 형성하면서 수준 높은 공동체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EU의 당초 목표였던 '통합'과는 멀어지고 있다. 최대 걸림돌은 역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입김이 너무 세다는 것이다. 'EU는 독일의 제4제국'이라는 조롱도 나온다. 비주류 EU 회원국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독일과 동맹 관계를 맺어온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독일에 대한 반감이 깊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EU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선 직후인 지난 2017년 소르본 연설에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단일예산 책정, 유로존 재무장관 창설 등의 개혁을 주창했다. 독일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견제한 것으로 독일과의 동맹 아래 그간 감춰왔던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독일 군 동맹(Franco-German motor)을 제안했으나 메르켈 총리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 의회선거를 앞두고 다수석을 차지하기 위한 야심을 내세운 것도 EU 개혁과 무관하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마크롱이 ‘EU 르네상스’에 불을 댕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 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프랑스 유럽의회 선거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마린 르펜이 이끄는 RN이 24~24.2%의 지지율로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레퓌블리크 앙마르슈(LREM·전진하는 공화국)'의 22.5~23%를 근소한 차이로 앞지르며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따지고 보면 브렉시트도 반EU 정책의 일환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지난 2016년 자신과 집권당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반난민 정책을 앞세워 EU 탈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까지 단행한 이후 EU 역사상 최초의 탈퇴 확정국이 됐다. 당초 영국은 3월 29일 탈퇴할 예정이었으나 영국과 EU 간 브렉시트 합의안이 영국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10월 31일로 연기됐다.
예정대로 탈퇴했다면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이번에도 투표권을 행사하게 됐다. 투표 결과가 브렉시트 여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브렉시트에 대한 민심의 향방을 파악할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은 이번 선거를 두고 '미니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같다며 결과에 따라 영국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켈 총리는 2021년 정계 은퇴를 기정사실화했다. 그간 EU를 중심부에서 이끌어왔던 메르켈 총리가 정계를 떠난다면 EU 분위기 자체가 반전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해 주요 회원국들은 지난 2015년 메르켈 총리가 난민 위기로 코너에 몰렸을 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극우·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세력 확장은 EU의 난민정책과 유럽 통합 노력을 궁지로 몰아넣기 쉽다.
독일은 이번 의회선거를 통해 다시 한 번 ‘화합’을 다지려는 꿈을 갖고 있다. 송곳처럼 솟아 나온 우파 포퓰리즘 정당을 잡을 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오랜 동맹인 프랑스·영국과 먼저 손을 잡는 것이 빠른 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영국 저널리스트인 기드혼 라흐만은 최근 FT에 기고한 글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캐머런 전 총리는 표면상으로는 공통점이 없지만 내부 정치 상황과 EU 개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비슷하다”며 “둘 다 메르켈 총리에게 도박을 걸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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