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치까지 36년' 리스본의 악몽을 기억해야
글로벌 돈육시장 예측불허의 경련 대비책 필요
# ASF, 그저 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는가
황금돼지해의 역설인가. 정말 코밑까지 왔다. 바다 건너 남의 일처럼 보다가, 한반도까지 온 뒤에야 소름이 돋는다. 북한 압록강 옆 자강도 우시군의 협동농장에서 돼지 99마리 중에서 77마리가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약칭 ASF)에 걸려 죽었다. 지난 5월30일 세계동물보건기구에 북한이 이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튿날인 31일 우리 정부는 바빠졌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북한 접경지역 10개 시군(강화,옹진,김포,파주,연천,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정하고 농가 310곳을 긴급방역했다.
이것만으로는 불안했을까. 다시 이튿날인 6월1일엔 이낙연 국무총리가 인천 강화군의 양돈농장과 해병대 교동부대를 찾았다. 멧돼지에 의한 전염병 유입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강 하구의 물길을 따라 바이러스를 품은 야생멧돼지가 접경지역을 넘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야생멧돼지는 스스로 감염되지는 않지만,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다.
불안을 돋운 건, 북한출신 축산전문가 조충희(굿파머스 연구위원)씨다. 그는 3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북한 노동신문이 작년 11월경 ASF에 대해 대대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면서, “황해북도 사리원과, 평안북도 신의주, 양강도 해산에서도 돼지가 감기처럼 앓다가 죽는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북한 전역에 퍼져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런 추측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하더라도, 귀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 치사열 100%에 얼려도 안죽는 바이러스
대체 ASF가 뭐길래, 이렇게들 불안해하는가. 이 전염병은 사람에겐 감염되지 않는다. 돼지과가 아닌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오직 돼지들의 저승사자다. 고병원성과 중병원성, 저병원성으로 균주(菌株)가 나뉘는데, 대개 8일 내에 죽는 것이 고병원성, 20일내에 죽는 것이 중병원성이며, 저병원성은 만성으로 풍토병에 해당된다. 지금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온 것은 고병원성으로 알려져 있다. 치사율 100%이며 감염된 돼지는 고열,구토,피부 출혈 증세를 보이다가 열흘을 못넘기고 간다. 이 바이러스는 고기를 얼린 상태에서 1000일을 버텨내고 소금으로 절여도 1년을 산다. 감염된 돼지가 회복되어도 바이러스는 죽을 때까지 남아있다. 농장기구, 의복, 가축사료의 오염으로도 전염된다. 한번 앓고난 돼지농장은 전염 가능성 때문에 다시 간판을 달 수 없다.
이제 돼지열병 잔혹사로 들어가보자.
이 질병은 사하라사막 남쪽에서 도사리고 있던 토착전염병이었다. 1921년에 케냐에서 야생멧돼지가 사육돼지에게 ASF를 옮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돼지급살의 전염병은 잊히는 듯 했으나, 1957년 제국주의 번성의 끝물을 누리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사태의 시작은 아주 사소해 보였다. 식민지 앙골라에서 출발한 큰 선박은 리스본에 도착해 음식물찌꺼기를 버렸다. 항구의 사람들은 이 잔반(殘飯, leftovers)을 수거해 돼지사료로 썼다. 그러자 사료를 먹은 돼지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리스본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섭씨 75도의 물에 끓이기만 해도 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포르투갈이 돼지를 몰살시킨 저주의 질병과 싸운 것은 무려 36년간이었다. 1993년에야 두억시니같던 전염병이 물러갔다. 이베리아반도의 또다른 나라 스페인도 비슷했다. 1960년 에 발병했고, 35년 뒤인 1995년에야 이 질병을 떨칠 수 있었다.
# 리스본의 악몽, 그리고 조지아의 재발
그뒤 한 동안, 이 전염병은 사라진 듯 했다. ASF가 스페인에서 물러난지 12년 뒤인 2007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조지아에서 불쑥, 이 질병은 얼굴을 내민다. 그해 여러 국가를 돌아서 온 크루즈선이 조지아 해군사령부가 있는 흑해 연안 포티항구에 닿았다. 이 배는 리스본의 경우처럼 남은 음식 쓰레기를 조지아에 내려놓는다. 이 음식들이 가열처리 없이 가공되어 그곳의 돼지들에게 전달됐고, ASF는 조지아로 스며들었다.
이 불청객은 조지아에서 가까운 코카서스 지역과 동유럽으로 번지고, 한편으로 동진(東進)하여 동아시아까지 번진다. 우리 코밑까지 다가온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조지아발(發) 궤도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2018년 8월 중국으로 온 ASF는 랴오닝성 선양(瀋陽)을 덮쳤다. 인구 800만명으로 동북3성 중에 가장 큰 선양은, 교통의 요지로 전염병을 사방으로 옮기는 구실을 한다. 2019년 2월까지 선양에서 28곳이 발병했고 중국 전체로는 137건이 발생했다. 이 질병은 또, 올 1월 몽골로 올라갔고(11건) 2월엔 베트남(2782건)과 캄보디아(7건)로 내려왔다. 특히 베트남은 전파 속도가 심각하다. 그리고 5월에 북한으로 번진 것이다.
# 중국과 한국은 돼지고기 수입국
중국은 세계 전체의 돼지 사육 두수(9억 마리)의 절반인 4억5천만 마리를 기르고 있다. 한달 만에 2400만 마리를 도축하는 양돈 초대국(超大國)이다. 작년 기준으로 이 나라는 5496만t의 돼지고기를 생산했으며 5624만t을 소비했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이지만, 소비는 그보다 더 많아 오히려 128t이 모자라는 셈이다. 중국은 작년 160만t의 돈육을 수입한 바 있다. 이런 나라에서 ASF로 돼지들이 쓰러지면, 글로벌 시장을 요동치게 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은 올해 추정치를 기준으로 돼지고기 생산량을 1262만t으로 잡고 있다. 이중에 252만t(생산량의 20%)을 수출한다. 이 수출량은 세계 돼지고기 교역량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한국은 어떨까. 2018년 돼지고기 생산량은 92만t이며 자급률은 64% 정도다. 소비량은 143만t 쯤 된다는 얘기다. 51만t은 수입해야 한다.
ASF로 돼지 품귀가 오면, 까무러칠 곳은 중국이며 그에 못지 않은 정도로 고통을 받을 국가가 우리나라다. 돼지고기보다 쇠고기를 좋아하는 미국은,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선 유리한 입장이랄까. 무엇보다 ASF 발병국가는 돼지고기 수출이 금지된다. 이 질병이 일으킬 가장 무시무시한 결과는 세계적인 돼지파동과 연쇄적인 경련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시장구조다.
# 퇴치에 36년 걸린 투병을 기억하라
우리는 아직도 이 질병의 공포가 실감나지 않을지 모른다. 지난 3월14일 중국 국적 여행객이 한국으로 들여온 중국산 돼지고기 가공품(소시지와 햄버거)에 ASF 바이러스 유전자가 나와 경악케 했다. 북한에서 멧돼지가 분단을 넘어 들어와 돼지열병을 퍼뜨릴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그런 루트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었다.
코밑에 바싹 다가와 급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이 돼지전염병은, 다른 질병들처럼 한번 휩쓸다 지나가는 그야말로 ‘일시적 유행병’만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일제 36년의 악몽을 떠올리는 우리는, 저 ‘ASF투병’의 리스본을 기억해야 한다. 전염병 퇴치에 36년이나 걸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년작)'의 한 대목이 이 시점에서 의미심장해진다.
"환자나 의사에게는 휴가가 없다. 전염균은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다시 행복한 이 거리로 습격해온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이 질병은 가뜩이나 움츠린 이 나라 경제에 절망을 전염시킬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가상해 이 전쟁의 방어체계를 세우라는 전문가의 경고를 흘려들을 수 없는 타이밍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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