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며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다.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경력으로 '사회주의 성향 독립운동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선정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하지만, 학계에선 김원봉의 월북 이유가 친일파에게 수모를 당해서라는 평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친일경찰 노덕술이 해방 뒤 다시 경찰 간부가 돼 김원봉을 체포해 모욕을 주고 뺨을 때렸던 일이 있었다. 당시 김원봉은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고 울분을 삼켰다는 일화가 있다.
문 대통령도 지난 2015년 8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원봉에 "일제 경찰이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항일 투쟁의 치열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 하지만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불우했던 독립투사"라며 김원봉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남에서 그는, 일제 고등계 악질 형사였다가 미군정 하에서 수도 경찰청 고위 경찰로 변신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가 가혹한 고문과 수모를 당했다"라며 "남북협상 때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남아 정부의 고위직이 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숙청됐다. 그 때문에 그는 북에서도 금기하는 인물이 됐고, 남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원봉은 지난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에서 숙청됐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에 마지막 국무위원이기도 했지만, 의열단 단장이란 직책만 알려지고 있을 뿐, 일본강점기 거의 모든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 사건의 배후에 그가 있었다는 활약상은 가려졌다.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그만큼 빈약해진 것"이라며 "일본강점기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길이고, 항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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