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⑥] 복수의 화신, ‘조씨고아’ 도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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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
입력 2019-06-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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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성·작품성 뛰어난 고전…중국 희곡 최초로 유럽에 전파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어쩌면 복수는 인간에게 있어 본성과 이성의 기로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영원한 딜레마인지 모른다. 여기 본성에 충실했던 대표적인 복수의 화신이 있다. 바로 ‘조씨고아(趙氏孤兒)’의 도안고(屠岸賈)라는 인물이다.

조씨고아는 원대(元代) 작가 기군상(紀君祥)이 ‘춘추’와 ‘사기’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된 조씨 일가의 이야기를 잡극(雜劇)으로 극화한 희곡이다.

잡극 조씨고아는 본격적인 극을 시작하기 전이나 중간에 어떤 사건을 끌어내기 위해 넣은 간단한 극인 설자(楔子)와 서양 연극의 막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 개의 절(折)로 구성됐다.

조씨고아의 도안고는 자신을 총애하던 영공이 조씨 일문에게 시해를 당하고 영공의 동생 성공의 재위기간동안 절치부심하며 원한을 품고 있다가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 허나 그 복수는 정당한 복수가 아닌 부당한 복수가 돼 버렸다.

영공은 행실이 좋지 못해 천명을 잃어버렸다. 천명을 잃어버린 왕의 시해는 정당한 것이니, 영공을 위한 도안고의 복수는 이미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빌미일 뿐이다. 또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돼 버려 대의명분이 서지 않았다. 하늘로부터 천명이 거둬진 군주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닌 처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도안고는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주요인물이다. 우리 모두 인간인지라 당시에 본성보단 이성에 따라 본인이 당한 만큼만 자로 잰 듯이 갚아 주는 이상적인 ‘교정적’ 복수란 쉽지 않다. 설사 그렇다 해도 도안고의 복수 방법과 과정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조씨고아 첫 시작에서 도안고는 “제 때에 마음을 다 하지 않고, 지나고 나서 공연히 분통 터뜨리네(當時不盡情, 過後空淘氣)”라고 노래한다. 도안고는 마음속에 묻어 뒀던 원한의 심상(心象)을 세세토록 인구에 회자 되는 잔인한 복수극으로 실천했다.

이에 대해 원대 중국인들은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미래의 희망을 도안고에게 이입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물의 스테레오 타입을 살기등등한 잔인함으로 규정지었다.

도안고는 극악무도한 절대 승자로서만이 아닌 배신을 당해 죽은 초라한 패배자로 전락하는 반전의 주인공이다. 그는 청맹과니처럼 본인이 그토록 찾아 죽이려던 조씨 집안의 유일한 혈육이자,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집안에 들인 양아들 조씨고아를 20년 동안 정성껏 키웠다. 그리고 처참히 조씨고아에게 살해를 당했다.

도안고는 하늘의 움직임을 읽지 못 했고, 백성의 마음도 얻지 못 했으며, 자신의 집안 역시 다스리지 못하고 그저 잔인한 이미지만 현대의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경극 조씨고아 도안고의 검보에 잘 반영돼 있다.
 

경극 도안고 검보(왼쪽), 경극‘조씨고아’ 조씨고아와 도안고. [사진=바이두 캡처]


홍색 십자문검(十字門臉)으로, 흰색 바탕에 홍색으로 이마에서 코까지 관통해서 칠한다. 여기에서의 홍색은 선홍색으로, 사람을 죽이는 성정과 살기를 상징한다. 도안고 검보의 눈두덩이는 까치 눈두덩이로, 눈 끝으로 갈수록 점점 날카로워지고 기울기도 급하게 표현한다. 눈썹은 박쥐 눈썹으로, 눈과 눈썹을 모두 날카롭게 그린다. 콧방울 옆에 움푹 들어간 곳은 높이 솟게 표현한다. 이는 모두 성격이 포악하고 음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중앙선 양 옆에는 잔인함을 더 강조해 주기 위해 조씨고아 3절에 나오는 도안고가 정영에게 채찍을 주며 공손저구를 때리면서 자백 받아내게 하는 장면에서 대표이미지를 뽑아 채찍과 피가 튀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다른 지방희의 도안고 검보에도 잔인함이 드러난 색과 아이콘을 사용하고 있다.
 

진강 도안고 검보(왼쪽), 월극 도안고 검보. [사진=바이두 캡처]


조씨고아는 청대(淸代) 왕국유(王國維)가 관한경(關漢卿)의 ‘두아원(竇娥寃)’과 함께 ‘세계의 유명 비극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비극성과 작품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청중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서양사람들도 일찍이 이 작품에 주목해 중국 희곡으로는 최초로 유럽에 번역돼 전해졌고, 유럽 희곡계에 쉬누아즈리(Chinoiserie, 중국풍)를 거세게 일으켰다.

오늘날에도 영화, 드라마, 연극,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대중들과 함께 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비극작품이라는 명성만큼 새롭게 해석되고 각색될 때마다 문화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원작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그 중심에 전개되는 잔인한 복수와 인간적 배신을 감당하는 도안고의 반전 이야기는 시공간을 뛰어넘은 인간 보편적인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복수의 시작은 기다림이고, 복수의 끝은 허무함이다. 정당한 복수든 부당한 복수든 본질과 명분은 없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다. 그래서 볼테르(Voltaire)는 조씨고아를 개작해 만든 희곡 ‘중국고아’에서 도안고를 정신문화로 교화되는 칭기즈칸으로 탈바꿈시켜 등장시켰던 것일까.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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