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밀양사람 김원봉(1898~1958)이요.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 때 남쪽의 문재인 대통령이 내 이름을 언급했다 하여 무슨 얘긴가 해서 잠깐 들렀는데, 마침 인터뷰 요청을 하시니 마다할 수 없어서 응했소이다."
- 아, 예. 고맙습니다. 호칭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의열단 시절 단장을 맡아 '의백(義伯)'이라 불렸기에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의백은 자신을 밀양사람이라 소개했는데(영화 '암살'의 한 장면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지요.
"나는 밀양 내이동 901번지에서 태어났소. 할아버지는 역관 출신이고 아버지는 3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소. 12살 때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했다는 소문을 듣고 꿈을 키웠던 '안중근키즈'였다고 할 수 있지요. 이듬해인 1910년 13살의 나이로 나라가 병탄되는 것을 보았소. 1911년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녔는데 그해 천장절(천황탄생일을 그렇게 불렀소) 행사 때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쑤셔넣는 바람에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 어떻게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지.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나운 뒤, 동화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연무단(練武團)을 만들어 군사훈련을 했고 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된 뒤 밀양 표충사에 들어가 중국 병서를 탐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1913년 서울로 상경해 중앙학교를 다녔는데, 교내 웅변대회에서 '사회발전은 종교에 있느냐 교육에 있느냐'라는 제목의 웅변을 해서 유명해졌죠. 일제와 싸우려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 1916년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에 입학도 했었죠. 독일인이 운영하던 학당이 1차대전 이후 폐쇄됐고, 나는 밀양으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1918년 9월 독립투쟁을 하다가 죽겠다는 꿈을 품고 다시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21살 때 가서 48세 때까지 27년간 고국 땅을 밟지 못했지요."
- 의열단 활동에 대해 말씀을 좀 해주시죠.
"의열단은 '정의를 맹렬히 행하자'는 뜻으로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 중국인 농민의 셋집에서 결성됐습니다. 10대와 20대 13명이었죠. 단원들은 '7가살(七可殺, 마땅히 죽여야할 7가지 대상)'을 정했죠. 조선총독과 군 수뇌, 친일파와 밀정 등이 포함돼 있었죠. 이를 시행하기 위해 1920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웠습니다. 의열단은 총독부 폭파시도 2회, 부산경찰서장 살해, 밀양경찰서 폭파, 일본 육군대장 상해저격사건 등 거침없는 공격으로 일제를 압도했습니다. 이런 활동에 러시아 레닌의 지원자금을 받기도 했죠."
- 해방에 임박해서는 임시정부 일도 하셨지요?
"예. 나는 이념보다 나라의 독립 쟁취가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임정이 무장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나의 폭렬(爆裂)활동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외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2년 뒤 임정 군무부장에 선출된 것은, 임정과 '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뜻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 역사가 빚어낸 역설일 수도 있는데, 의백은 남측의 관점에서 보면 '야누스' 같은 인상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1948년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북한에 남았습니다. 남쪽에서 민족통일의 계기를 만들어보려 했으나 친일파의 득세에 굴욕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월북한 그해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됐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첫 국가검열상으로 임명됐습니다. 한국전쟁 때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북한군 군량미 생산을 담당했으며 이 공로로 김일성 훈장을 받기도 했지요. 1954년 1월 25일 4인의 간첩단 남파를 지휘한 것도 사실입니다. 1958년 11월 연안파를 중심으로 김일성 비판론이 일었지요. 저도 그 무리에 섞여 숙청됩니다."
- 50세부터 60세까지의 '김원봉'은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전쟁까지 치른, 명실상부한 남쪽의 적이었군요. 숙청 당시 한국 망명을 시도했다가 체포됐고 이후 정치범 수용소에서 자결했다는 설이 있던데?
"그 문제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드리고 싶군요. 이념의 대치로 빚어진 전쟁과 갈등을 절대적인 선악 개념으로 보는 것은 현실적이기는 하나 좁은 관점입니다. 전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달리 볼 여유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북쪽에도 존재합니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쪽에 모두 참혹한 피해를 입힌 비극이란 결과론적 사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제, 문재인 대통령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왜 하필, 대통령은 현충일날 김원봉이란 이름을 거명한 것일까요? 추념사에선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미국 전략정보국과 함께 작전을 펴려했던 광복군의 군사역량이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군요.
"사실, 그 발언만을 보자면, 의미 부여가 조금 과한 느낌은 있으나 사실에서 어긋난 것은 없소이다. 하지만 나를 거명한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현충일의 상징적 의미를 무시한 발언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굳이 내 이름을 거듭해 꺼내는 까닭은, 내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특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무슨 말씀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면?
"나, 김원봉은 해방 전 '최고의 독립투사'라는 역사적 영예와 해방 후 총부리를 겨눈 이념적 적대자로서의 역사적 악역을 동시에 떠안고 있는 이율배반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는 내가 삶의 원칙을 바꿔 훼절(毁節)하거나 문제적 선택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땅의 역사가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단일목표, 단일정체성이었습니다. 국권 회복과 우리 민족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단일의 민족정체성이 이념으로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국토의 분단만큼이나 '가치'의 분단이 일어난 것이죠. 머릿속에서는 나라를 그릴 때 한반도 전체 지도로 그리면서도 국가를 말할 때는 분단의 한쪽만을 가리키는 정체성 모순도 겪어왔죠. 단일정체성 때의 김원봉과 정체성 분단 때의 김원봉이 다른 잣대로 읽히는 것이라고 보면 맞지 않을지요?"
- 만약에, 남쪽에서 의백에게 서훈을 하고 일제하의 활동에 걸맞은 영예를 부여한다고 하면 수용을 하실 건가요?
"나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을 받은, 역사의 기아(棄兒)가 되어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나의 북쪽 이력을 가지고 공격을 하고 있고, 북쪽에서는 나의 임정 경력을 가지고 문제 삼았습니다. 아직 이 분단의 외눈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훈을 받는 것이 어찌 정상적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남쪽 정부가 정치적 명분을 얻고자 하는 전략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분단된 나라의 남쪽에서 내가 받을 서훈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한반도 평화가 정착이 되고 양쪽이 서로의 이념에 대해 관대해지고 지난 전쟁에 대한 상호 치유가 이뤄지면, 그땐 당당히 서훈을 받을 수 있지 않겠소이까."
- 서훈 규정을 고쳐서라도 의백에게 의열단과 광복군의 공적을 기리려는 정부의 뜻은, 시기상조라는 말씀이군요. 북한 주체사상의 기획자로 1997년 망명해온 황장엽이 2010년 사망 이후 대한민국 무궁화장을 받고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묻혀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남쪽의 정부가 결정한 일이니 내가 말할 바는 없지만, 과거 이력에도 불구하고 13년간 한국 내에서 해온 북한인권운동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묘비에 '주체사상'을 '인간중심철학'이라고 기록해놓은 것은 나로서는 놀랍습니다. 나의 서훈을 비판하는 논리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져서 하는 말입니다."
- 사실 대통령이 언급한 김원봉은, ‘암살’ 영화를 감명깊게 본 대통령의 취향에서 호명된 이름도 아니며 현충일이 기려야 할 핵심대상이라 할 수 있는 전몰장병을 망각하고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실언 끝에 나온 인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오히려 2019년 대한민국의 상공에 떠도는 ‘이념의 공기’를 의백을 통해 바꾸고자 하는 뜻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성급해 보입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협상들이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둘러 이념부터 해금(解禁)하려는 것은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김원봉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면, 의백의 삶의 한쪽 측면을 부각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격하는 갈등이 관성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겠죠. 의백은 최고의 순국선열이면서 호국영령들에겐 치명적인 적이니까요.
"문 대통령은 길게 봐서 통일로 가는 한반도 평화의 큰 그림을 생각하며, 이념적 관용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의 가치구도를 만들자는 거겠죠. 이런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치적 이익을 겨냥한 이념적 공세를 퍼붓는 것은 퇴행적인 행태입니다. 사실 남북평화나 통일 구호가 자주 공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문제는 상대가 있는 '게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이념의 극복을 바탕으로 하며, 현재의 이념적 대치와 불화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죠. 이 정부 들어 이어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회담의 목표는 이념을 극복하는 평화체제의 구축일 것입니다. 논란을 각오하면서 나를 받아들이려는 것은, 분단극복의 몸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의욕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며, 민심의 충실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겁니다. 집권기간에 성급히 행한 것들은 자주 역풍을 맞더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