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을 내줘도 볼넷은 허용하지 마라.”
빅리그 최정상급 투구를 이어가고 있는 류현진(LA 다저스)의 경이로운 수치 중 하나는 삼진/볼넷 비율이다. 류현진이 유독 볼넷을 꺼리는 이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조언 한 마디 때문이다. “홈런은 맞아도 괜찮아. 네 책임이니까. 하지만 볼넷을 내줘서 야수를 힘들게 하지는 마라.” 아버지 류재천씨의 조언에 류현진은 볼넷 없는 투수로 성장했다. 류현진도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게 볼넷이다. 그래서 나도 홈런을 내주는 것보다 볼넷을 허용하는 게 더 싫다”고 늘 강조한다.
류현진은 17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해 7이닝 동안 8개의 삼진을 잡고 볼넷은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 올 시즌 85개의 삼진을 잡으며 단 5개의 볼넷만 허용한 류현진의 삼진/볼넷 비율은 17.00으로 더 올랐다. 메이저리그 전체 압도적 1위다. 이 부문 2위 맥스 셔저(워싱턴 내셔널스)는 6.80에 불과해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미국 아버지날을 맞아 하늘색 모자를 쓰고 마운드에 오른 류현진이 이번엔 아버지의 이름으로 환상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류현진은 7이닝 동안 안타 7개를 맞았으나 사사구 없이 8탈삼진 비자책(2실점)으로 역투했다. 2-2 동점인 7회까지 책임진 류현진은 시즌 10승(9승 1패) 달성이 무산됐으나 팀의 3-2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이날 내준 2점도 야수 실책에 의한 아쉬운 실점이었다.
올해 계속된 이른바 ‘효심 투구’다. 류현진은 한국 어버이날인 5월 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 9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둔 뒤 5월 13일 미국 어머니날에는 어머니 박승순씨가 시구자로 나선 워싱턴 내셔설스전에서 8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그는 공교롭게 미국 아버지날에도 어김없이 등판해 효심을 뽐냈다.
류현진과 아버지는 각별한 사이로 잘 알려져 있다. 류씨는 류현진이 야구에 입문한 초등학교 때부터 자택 옥상에 개인훈련장을 만드는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다. 다만 훈련을 강요하는 극성스러움은 없었다. 그동안 류씨는 뒤에서 아들을 응원하며 조력자 역할만 해왔지만, 이제는 그저 지켜만 봐도 든든한 아들이 됐다. 특히 이날 경기는 ESPN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됐다. ‘전국구 스타’로 완전히 발돋움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도 흐뭇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류현진은 이날 시즌 10승과 통산 50승 달성이 무산됐다. 5회까지 무실점 완벽투를 펼친 류현진은 1-0으로 앞선 6회가 아쉬웠다. 3루수 저스틴 터너의 송구 실책 탓에 위기를 맞은 뒤 빗맞은 안타 등으로 2실점했다. 류현진은 2-2 동점인 7회초까지 책임지고 마운드를 내려가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다저스는 류현진이 이닝이터 역할을 충분히 해준 덕에 8회말 결승점을 뽑아 값진 승리를 챙겼다.
10승 문턱에서 또 한 번 멈춘 류현진은 비자책으로 시즌 평균자책점을 1.36에서 1.26으로 더 낮췄다. 이 부문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가운데 1점대 평균자책점은 류현진이 유일하다. 2위 루이스 카스티요(신시내티 레즈)는 2.20으로 류현진과 1점 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다. 또 류현진의 홈 평균자책점은 0.87까지 떨어졌다.
이날 경기 이후 미국 언론은 류현진을 극찬하며 ‘강력한 7이닝 투구’, ‘만원관중 앞에서 압도적인 7이닝’이라는 표현을 썼고,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오늘밤 류현진은 우리 팀에 큰 힘이 됐다”며 “류현진은 시즌 내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지 못한 적이 없다”고 칭찬했다.
빼어난 호투에도 승리까지 챙기지 못한 류현진은 “승리투수까지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팀은 이겼고, 늘 그랬듯 팀이 이길 수 있게 선발 투수로서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그건 해낸 것 같다”며 아버지날 ‘10승 선물’을 선사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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