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 지명자는 전혀 달랐다. 그는 2013년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로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일 때 ‘상관(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지휘 감독에 따르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그러자 윤 지명자는 거침없이 답변했다. ”위법한 지휘 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 지시 자체가 위법한데 어떻게 따르느냐. 물고문 해서라도 자백 받으라고 지시할 때 이의 제기하나? 누가 봐도 위법한 지시를 하면 따르면 안 되는 것이다.”
위법한 지시는 이의 제기할 것도 없이 그냥 거부하면 된다는 말이다. 윤 지명자의 답변을 따지고 들자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고문’을 지시했다면 누가 봐도 명백한 위법이다. 그러나 상관 지시 중에는 위법인지 아닌지가 명백하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럴 때 부하가 스스로 위법이라고 단정하고 지시를 거부해도 될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지만 ‘위법한 지시는 따르면 안 된다’는 이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윤 지명자의 소신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사람(인사권자)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검찰총장 최고의 덕목
그는 원세훈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문제 등 국정원 수사를 놓고 ‘외압이 있었다’고도 했다. 의원들이 '거기에 황교안 (당시) 법무부장관도 관련되느냐’고 묻자 윤 지명자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서울중앙지검장은 물론 법무부장관까지도 외압을 넣었다고 스스럼없이 공개한 것이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이 보다 못한 듯 “이런 검찰 조직을 믿고 국민이 안심하고 사는지 걱정된다. 세간의 조폭보다 못한 조직이다”면서 “사람(채동욱 검찰총장)에게 충성하는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채동욱 총장은 윤 지명자를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으로 발탁한 인물이다. 당시 채 총장은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선거법 적용을 지지하고, 법무부는 반대하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었다.
정 의원 질문에 대한 윤 지명자의 답변 역시 거침이 없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사권자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법’ 또는 ‘국가’나 ‘국민’에게만 충성한다는 뜻이다. 공무원은 승진하거나 요직을 맡는 것을 목숨만큼이나 중시한다. 자기를 승진시키거나 좋은 보직에 앉힌 인사권자에게 무한한 충성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데 윤 지명자는 그 인사권자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위법한 지시는 따르면 안 된다’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오늘날 대한민국 검찰, 특히 검찰총장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검찰이 정권의 충견(忠犬)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은 지 수십년 됐다. 그 가장 큰 원인은 검찰총장부터가 정권의 ‘불법, 부당 지시’를 거부하기는커녕 정권 입맛에 맞게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법’에 충성하지 않고 인사권을 가진 권력자 즉 ‘사람’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역대 총장 중 정권 압력 막다 사임한 사람 한 명도 없어
이제 윤 지명자가 할 일은 본인 스스로 밝힌 소신을 검찰총장이 돼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마침 윤 지명자는 국정 농단, 사법 농단 등 이른바 적폐 수사의 총책임자였다. 이는 그가 검찰총장이 됐을 때 검찰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문재인 정권에선 적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뒤늦게 적폐 문제로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떨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적폐를 만든 1차적 책임은 적폐 행위를 한 권력자들에게 있지만, 검찰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검찰이 진작에 정권 눈치를 보지 않고 권력 비리를 수사했다면 적폐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아주 적었을 것이다. 권력의 불법과 비리에 검찰이 제 역할을 못해서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적폐가 된 것 아닌가.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길은 간단하다. 윤 지명자의 소신대로 ‘위법한 지시는 따르지 않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핵심 권력자, 대통령 친인척과 주변 인물 등 권력의 비리를 눈을 부릅뜨고 찾아내고, 적발된 비리는 청와대 눈치 보지 않고 수사해 처벌하는 것이다. 청와대의 불법 지시와 부당한 압력이 들어오면 스스로 나서서 막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할 것이냐 총장 직을 버릴 것이냐 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수도 있다.
윤 총장의 진가(眞價)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때다. 자기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이어 검찰총장을 시켜준 대통령에게 충성하느냐, 법에 충성하느냐이다. 그가 정말로 검찰과 나라를 생각한다면 선택은 하나다. 법에 충성하는 것이다. 국민에게 모든 걸 공개하고 총장 직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권 압력에 맞서 싸우다가 최초로 사임한 검찰총장이 되는 것이다.
1988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검찰총장 2년 임기제가 도입된 이후 검찰총장 16명 가운데 10명이 임기 중 사임했다. 그러나 사임한 사람 중 정권의 압력이나 불법 부당한 지시에 맞서 싸우다가 그만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법무부장관 영전, 검찰 내 분란, 본인의 부도덕 행위나 친인척 비리 등으로 그만두었을 뿐이다.
다소 예외라면 노무현 정권 때 사임한 김종빈 검찰총장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인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구속 수사하려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불구속 수사하라고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하자 이를 수용하고 사표를 냈다. 김 전 총장은 퇴임사에서 “법무부장관이 피의자의 구속 여부에 대한 수사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심히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표현을 10번이나 썼다. 그만큼 부당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가 장관의 부당한 지시에 항의해 사표를 낸 것만 해도 의미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법무부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는 부당하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뒤 구속 수사 지시를 내리고 사표를 냈다면 어땠을까? 검찰총장이 정권 압력을 몸으로 막은 더욱 생생한 전례가 되지 않았을까?
윤 지명자가 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사임한 최초의 검찰총장이 된다면 영원한 검찰총장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검찰 조직은 비로소 권력의 충견이라는 비아냥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권력의 적폐가 사라지고 나라다운 나라가 될 것이다.
반대로 윤 지명자가 정권과 부딪칠 일을 아예 만들려 하지 않고,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적당히 넘어간다면 검찰은 영원히 권력의 충견에 머물게 될 것이다. ‘위법한 지시는 따르면 안 되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발언은 말장난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 여부는 곧 판가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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