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들의 통화완화 움직임을 못마땅해 한다는 점이다. 그는 금리인하나 자산매입을 통한 외국 중앙은행의 돈풀기가 통화 가치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꼼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연준에 대해서는 금리인상 기조를 비판하며 금리인하를 압박해왔다. 그야말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주장이다.
◆트럼프 '내로남불' 통화부양...'환율전쟁'?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트위터를 통해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추가 부양 시사 발언을 비판했다. 드라기 총재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 전망이 개선되지 않으면 추가 부양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리오 드라기가 막 추가 부양 가능성을 발표해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갑자기 떨어졌다"며 "이러면 그들이 미국과 경쟁하는 게 부당하게 더 쉬워진다. 그들은 중국 등 다른 나라들과 함께 수년간 이렇게 해왔다"고 주장했다.
우선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떨어진 게 그렇다. 달러·유로 환율은 1년 새 1.16달러에서 1.12달러로 하락했다. 드라기 총재의 추가 부양 발언 뒤 유로화 약세가 두드러진 것도 사실이다.
통화 약세가 해당국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해당국이 수출하는 제품은 가격이 덩달아 싸지지만, 반대로 수입품 가격은 오른다.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일방적인 통화 가치 절하가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beggar-thy-neighbor policy)'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여러 나라가 자기 이익을 위해 통화 가치 절하 경쟁에 뛰어들면 '환율전쟁'이 된다.
◆"ECB 추가부양 목표는 환율 아냐"
상당수 전문가들은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드라기 총재를 상대로 제기한 환율전쟁 혐의는 근거가 희박하다고 지적한다.
비즈니스위크는 ECB가 유로존 경제 성장세를 자극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건 정당한 일이라는 게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의 중론이라고 전했다. 금리인하는 근본적으로 가계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 부담을 낮춰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부진한 성장세가 금리인하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금리인하에 따른 유로화 약세도 경기부양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유로화 약세는 일종의 '부작용'일 뿐, 목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드라기 총재도 추가 부양의 목표가 환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로화 약세가 유로존에 대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악화시켜 미국 경제의 성장둔화를 유발했다고 가정해보자. 연준도 경제 성장세를 북돋기 위해 금리인하에 나설 수 있다. 그러면 달러도 약세로 기울어 달러·유로 환율이 이전 수준으로 복귀할 수 있다. 연준이 당초 의도한 건 달러 약세일까, 경기부양일까. 물론 후자다. ECB도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미국과 유로존 같은 두 교역 상대가 동시에 금리인하를 단행하는 건 결국 누구도 이익을 보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 아니냐는 거다.
브래드 셋서 미국외교협회(CFR) 선임 연구원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조율이 잘 된 동시다발적인 통화완화는 수요를 더 크게 자극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연준과 ECB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통화완화 공조로 세계 경제의 회복을 주도한 바 있다.
◆"중국은 위안화 약세 추구 안 해"
중국이 환율 조작을 통한 위안화 평가절하로 이익을 보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더 설득력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위안화 가치를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위안화 절하 속도를 늦추는 데 힘써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기준금리 격인 1년 만기 대출금리를 2015년 10월부터 줄곧 4.35%로 묶어뒀다. 급격한 성장둔화가 기준금리 인하를 정당화한다는 지적에도 지준율만 수차례 낮췄을 뿐 기준금리는 그대로 뒀다. 아울러 중국은 외환보유액도 급격히 늘리지 않았다.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적극적으로 낮추려고 했다면, 위안화를 시중에 내다 팔고 달러 등 다른 통화를 사들여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했을 것이다.
셋서 연구원은 "이런 증거들은 중국이 환율전쟁을 피하려 한다는 걸 시사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도 엄포와 달리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못하고 있다.
마크 챈들러 배녹번글로벌포렉스 수석 시장전략가는 중국 지도부가 약한 통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위안화 약세의 단기적인 경기부양 효과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부가가치 사슬을 강화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그는 싼 위안화에 의존한 가격 경쟁만으로는 기술 수준이 낮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거들었다. 중국이 이젠 더 열심히 일하기보다 더 똑똑하게 일하는 걸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첨단기술 주도권 싸움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진짜 환율조작은?...대만이 대표주자
비즈니스위크는 환율전쟁은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 알아채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물론 불공정한 평가절하 혐의를 뒷받침하는 신호가 없는 건 아니다. 무역수지 흑자와 외국에서 유입되는 투자수입이 상당한 데도 중앙은행이 외환을 대거 사들여 자국 통화 가치를 낮추는 게 대표적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중국도 2014년 초까지 그랬고 한국과 싱가포르, 태국도 최근 몇 년간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다고 꼬집었다.
CFR의 셋서 연구원은 요즘 환율 조작 혐의가 가장 짙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대만을 꼽았다. 5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이 4640억 달러로 브라질, 독일, 인도 등 경제 규모가 더 큰 나라들이 가진 외환보다 많은 게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위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과 중국의 환율 조작을 문제 삼는 건 방향을 잘못 짚은 것 같지만, 그가 불공정 무역 관행을 폭넓게 보는 만큼 이들을 표적으로 한 트윗은 계속 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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