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방북으로 '북핵 게임의 플레이어가 3자에서 4자로 늘어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고들 하나 특별히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없던 중국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중국은 정전협정 당사국이다. 한반도 문제엔 자신들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에도 3자건, 4자건 줄곧 영향을 미쳐왔다. 이제 와서 '중국의 역할' 운운하니 새삼스럽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20일 국회 토론회에서 김연철 현 장관에게 “한반도 문제 해결구도가 남북미 3자에서 남북미중 4자로 바뀌는 기로에 있는데도 장관이 (각종 행사에) 축사만 하고 다닌다”고 질책했다고 한다. 외관상 3자였지, 실제로는 항상 4자였다는 걸 잘 알만한 선배 장관이 왜 그랬을까.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해온 “북 체제보장(제재 해제)과 비핵화의 단계적 동시이행”은 중국의 쌍궤병행(雙軌竝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 접하는 양 후배 장관을 나무라니 모양이 안 좋다. 단언컨대 중국은 설령 4자 논의구조의 한 축(軸)이 된다고 해도 쌍궤병행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축사’ 해프닝은 북핵 앞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이 정권의 무기력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개석상에서의 질책은 지나쳤지만 담당 장관이 “축사나 하고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을 정도면 상황은 심각하다. 필자는 최근 다른 모임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남북, 북미대화의 동력을 어떻게 하면 되살릴 건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다수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쥐어짰음에도 뾰족한 수를 못 찾았다. 뭘 내놓아도 대북 제재라는 벽에 막혔다. 그저 미중(美中) 움직임만 주시하는 모양새였다. 운전자? 남북관계의 자율성? 다 아득한 얘기였다.
필자는 궁리 끝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작년 9·19 공동선언에서 2032년 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 유치해 함께 치러보자고 합의한 걸 떠올렸다. 스포츠는 언제나 정치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간다, 성사만 된다면 남북관계는 바뀐다, 올림픽의 이상은 세계평화다, 올림픽이라면 지금의 교착상태도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032년이면 먼 얘기라고? 그렇지 않다.
지난 19일 프레스센터에선 대한언론인회, 한국체육학회,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2032년 올림픽 서울-평양 공동개최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간이 많지 않다”며 국민의 협조와 성원을 요청했다. 2032년 올림픽 개최도시는 개최 7년 전인 2025년에 결정된다. 규정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내일이라도 IOC위원들이 투표로 결정하면 그만이다. 2024년 올림픽(파리)과 2028년 올림픽(로스앤젤레스)도 조기에 결정됐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원장은 “내년 7월 도쿄 올림픽 때 열릴 IOC 총회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강력한 경쟁자인 호주의 브리즈번이, 서울-평양의 ‘최초의 분단국 개최’라는 명분이 대세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조기 투표를 요구 중이라는 정보가 있다”고 귀띔했다.
유치활동, 곧 IOC위원(2019년 현재 95명)을 상대로 한 득표활동은 2022년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공식운동 기간엔 IOC의 감시활동도 까다로워져서 창의적인 득표활동도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호주 외에도 2032년 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표명한 독일, 중국, 인도, 남아공, 이집트, 인도네시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국제대회가 올림픽 유치활동의 일선 현장이다. 다음 달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도 그렇다. 193개국이 참가한다고 하니 이보다 좋은 득표활동 무대가 없다. 남북이 함께 참가국들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곧바로 공동 유치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북한이 끝내 불참할 듯해 아쉽다. 북에 1300억원어치(5만t)의 쌀을 퍼주면서도 관련 체육회담 한 번 못 끌어낸 이 정부도 참 무능하다. 이러니 “축사나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는 것 아닌가.
물론 올림픽도 실질적으론 북핵과 연계돼 있다. 북핵이 풀리지 않으면 유치 자체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핵은 핵대로, 유치는 유치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행히 IOC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토마스 바흐 위원장은 이미 환영의사를 밝혔다.
필자는 이 토론회에서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이 성사되면 남북한과 주변 4강(미 일 중 러)과의 교차승인 정도는 이뤄지고, 내부적으로는 부문별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을 논의할 준비단계까지는 갈 것”이라는 요지의 기조발제를 했다. 남북 공동체(community) 속에 답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남북 간 ‘체육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체육공동위원회’ 같은 기구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단일팀 구성, 훈련, 국제대회 참가 등을 규율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회 때마다 단일팀 구성과 국기 문제로 남북이 갈등을 빚을 일도 없을 것이고.
오늘의 유럽연합(EU)도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C), 1992년 EU로 가는 경로를 밟지 않았던가. 당시 ECSC에선 유럽의 석탄·철강을 공동 생산·판매할 고위관리청을 두었는데 이게 뒷날 EU의 의회가 됐다. 우리도 스포츠-문화–철도–에너지 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확산해 나가면 그게 곧 남북연합의 토대가 되지 않겠는가.
필자의 이런 구상은 기능주의(functionalism)에 기초하고 있다. 쉬운 것부터 먼저 하고, 그러다보면 화해·협력의 물결이 비(非)정치적인 분야에서 정치적인 분야로 번져가는 파급효과(spillover effects)가 생긴다는 게 기능주의의 요체다. 어설픈 이념적 친북(親北) 행태보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이 더 현실정합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민족통일연구원의 서보혁 인도협력연구실장은 최근 ‘생활통일’이란 말을 썼는데 톺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북핵과 남북문제 해결의 보완재로서 올림픽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잠실 올림픽경기장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성화가 동시에 타오르는 날, 한반도는 우리가 이제껏 알던 그 한반도가 아닐 것이다. 그 길에 보수 진보가 따로일 수 없다. 여야는 지금이라도 국회에 ‘서울-평양 올림픽 특위’를 만들고 적극 지원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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