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사는 일선 주유소에 유류를 선공급한 뒤 신용카드 매출채권에서 대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하는 곳이다. 카드사와도 업무제휴가 맺어져 있어 매출이 발생하는 즉시 대금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였다.
투자를 권유한 H사의 펀드메니저 B씨는 “H사 펀드의 만기가 돌아와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데, 벤쳐캐피탈의 자금이 2~3주 가량 늦게 들어올 것 같다”면서 “브릿지론 형태로 100억원을 투자하면 괜찮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에 하나 투자가 들어오지 않더라도 유류대금 신용카드 매출채권이 있기 때문에 투자금 회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안심시켰다. 동네 후배로 오랜 지인이었던 B씨의 권유였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갔다.
A씨의 투자금 100억원이 입금되자마자 투자사인 H사는 곧바로 자금을 회수한 뒤 떠나 버렸고 확정됐다던 벤처캐피탈사의 투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뒤늦게 회사의 상태를 확인한 A씨는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신용카드 매출채권에서 바로바로 유류대금을 회수한다던 B씨의 설명과는 달리 부실화된 외상채권만 100억원에 달했다. 사실상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회사였던 셈이었다.
H사의 투자금도 이미 바닥난 상황이었는데, A씨가 투자한 돈이 아니었다면 H사도 원금 회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믿었던 후배와 대기업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A씨는 곧바로 금융감독원과 검찰이 후배 B씨와 H인베스트사, E사의 경영진과 대주주를 수사해 달라고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서는 A씨는 “외상으로 유류를 공급받은 주유소 중 상당수는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면서 의도적으로 회사 재산을 빼돌린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외상거래를 한 주유소가 사실상 E사의 페이퍼 컴퍼니가 아니냐는 의심이다.
아울러 H사 내부문건을 근거로 “외상거래를 빌미로 E사 경영진이 자금을 빼돌리거나 회사가 부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투자사인 H사도 알고 있었다”면서 “부실화된 E사로부터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개인투자자에게 손실을 떠넘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검찰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며 손을 놓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A씨와 H사의 주장은 상반되는 부분이 많다”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고 있는 만큼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겠다”라고 말했다.
현재 H사는 투자손실이 생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의도적으로 손실을 떠넘기려 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또 “E사의 부실을 묵인하거나 손실을 떠넘기려 한 적 없다”면서 “투자를 권유한 B씨가 H사의 펀드메니저라는 A씨 측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특히, E사가 외상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A씨도 알고 있었다면서 “A씨는 개인투자자도 아닐 뿐 아니라 투자 전에 E사의 상황을 알고서도 투자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자산에 투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검찰은 “아직 수사 중이어서 공개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법의 기업형 사기사건이 최근 잇따르고 있는 만큼 모든 가능성을 면밀하게 살펴볼 방침이다.
복수의 검찰관계자에 따르면, 대기업의 투자를 앞세워 개인투자자를 모집한 뒤 대기업이 투자금을 회수하면 부실채권을 개인투자자에게 떠넘기는 형태는 최근 등장한 기업형 사기사건 유형 중 하나다. 부실기업을 우량기업인 것처럼 꾸며 투자를 이끌어 낸 뒤 막상 투자가 들어오면 돈만 빼내는 방식이다. 사건에 따라 대기업 관계자가 사기범들과 공모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법 당국은 "대기업에 손실을 입힐 경우 형사사건화 되면서 문제가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개인투자를 유도해 대기업이 빠져 나가도록 한 뒤 범행을 마무리하는 식으로 수법이 정교화됐다"면서 투자자들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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