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이민을 '침략'에 비유한다. 남부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넘어가는 중남미 출신 이주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 단속을 강화하고, 민주당과 인권 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가 장벽 건설을 밀어 부치고 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으려는 이주민 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2020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멕시코는 최근 미국의 관세 폭탄 위협에 굴복, 자국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 했다. 또 망명 신청자가 미국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멕시코에서 대기하도록 하는 이른바 ' 이민자보호규약 (MPP)' 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동의했다. 망명 신청을 통해 합법적인 미국 입국이 극도로 어려워진 가운데 국경 순찰대까지 대폭 보강되자, 험준한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아이까지 데리고 밀입국을 시도하면서 이민자들의 사망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엘살바도르 이민 부녀의 비애
며칠 전 엘살바도르 출신 2살배기 여아가 미-멕시코 국경지대의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다 20대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은 전 세계인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리게 했다. 이 사건으로, 초강경 이민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태세이다. 그는 26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에 앞서 기자들에게 "국경을 열어두니까 사람들이 익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주장대로 국경 장벽을 세웠다면 아예 넘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민주당이 입법에 반대해 비극이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26일(현지시간) 첫 TV토론에 나선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들은 이번 사건을 트럼프의 반(反)이민정책이 낳은 참변이라며 불법 이민자에 대책 변화를 촉구했다. 자연스럽게 트럼프의 이민정책이 내년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망명담당 공무원노조 연방공무원들은 인권침해 논란이 일고 있는 MPP 정책의 중단을 요청하는 탄원서까지 제출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이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엘살바도르 출신 부녀가 리오그란데강을 헤엄쳐 건너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도 지난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MPP 규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 규약으로 망명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미국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멕시코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무려 1만 4천명이 넘는다. 그러나 대부분 이주자들은 치안 상황이 불안한 멕시코에서 대기하기보다는 밀입국해 국경수비대에 자수한 뒤 수용시설에 머무는 편이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비운의 엘살바도르 부녀도 망명 신청을 위해 멕시코에서 두 달을 기다리다 도강을 선택한것으로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밀입국 시도자들이 늘어나면서 미국내 수용시설과 예산 부족도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 하원은 27일(현지시간) 본회의를 열어 미-멕시코 국경에서 붙잡힌 이민자 보호를 위해 46억달러(약 5조3천억원)의 긴급 구호 예산을 지원하는 법안을 찬성 305명, 반대 102명으로 가결했다. 익사한 엘살바도르 부녀의 사진 공개와 이민자 아동 수용시설의 열악한 주거 실태에 관한 잇단 언론 보도가 이날 법안 통과의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법안 통과 소식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남부 국경을 위한 초당적인 인도주의 지원법이 방금 통과됐다. 아주 잘 됐다"라며 "이제 우리는 망명 제도를 고치고 구멍을 없애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캐러밴 행렬 저지가 2020년 트럼프의 핵심 공약
미국으로 몰려오는 중남미 3국 (온두라스.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주민들은 대부분 마약 거래와 관련된 갱단의 폭력과 살인을 피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현재 난민법에 따라 이들 3개국 출신 이주민들에게 '임시보호지위(TPS. Temporary Protected Staus)'를 줄 수 있다. 트럼프의 2020년 재선 '핵심 공약'은 '캐러밴(미국 망명 신청을 위해 대규모로 몰려오는 중남미 출신 이주민 행렬)을 막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난 대선에서 공약한대로 추가로 국경 장벽이 필요하다.
트럼프는 미-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35일에 걸친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정지)을 감수하며 민주당과 대립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15일 '국가 비상사태'라는 우회로를 통해 국방비에서 장벽 건설비용으로 67억달러를 전용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은 지난 5월 24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해 의회의 승인 없이 예산 사용처를 정한 대통령의 결정은 행정권의 재량을 넘는 것”이라며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계획의 일부를 중단하라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날 가처분 결정이 나온 것은 전체 67억 달러 가운데 10억달러에 대해서다. 이번 판결을 통해 남부 텍사스주와 서부 애리조나주 국경 지역에 추진되는 장벽 건설이 일시적으로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예산을 사용해 공사를 이어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미-멕시코 국경장벽
미-멕시코 국경은 3140여km이다. 한반도 휴전선 길이의 12배가 넘고, 중국 만리장성 길이의 반이나 되는 광활한 지역에 9m의 장벽을 설치, 중남미의 불법이민자들이 절대 넘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트럼프의 '황당무계'한 주장은 美 대선 공화당 경선 당시 선거용 구호 정도로 취급 받았다. 그 이유는 다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약 그 자체로도 많은 허점과 무리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멕시코 국경은 미국의 4개 주와 멕시코의 6개 주에 접하고 있다. 합법, 불법을 떠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사람이 횡단을 하고 있다. 매년 3억 5000만명이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고 있다. 또 매년 100만명 이상의 불법 입국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경의 상당 부분(약 1040km)에는 이미 장벽이 존재한다. 트럼프는 충분한 장벽 예산을 확보해, 나머지 빈 구간을 메우거나 기존의 펜스 장벽을 훨씬 견고하고 높게 만들고자 하지만, 민주당은 트럼프가 불필요한 안보위기를 조장한다면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문제에 대한 강수를 고집하는 것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지난 대선에서 자신에게 표를 몰아준 백인 복음주의자 등 자신의 핵심 지지층 결집을 위한 승부수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국경을 넘어오다 체포된 이민자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지난 5월에만 14만 4000명에 이르렀고, 이 중 10만 명이 이상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이민자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이민자 가족의 부모와 자녀를 분리하는 이민자 제한 정책을 펼치다가 ‘아동 인권 침해’라는 연방 법원의 판단에 따라 지난해 6월 이 정책을 중단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분리 정책을 중단한 뒤 10배나 많은 이민자 가족이 몰려오고 있다"며 "(미·멕시코 국경이) 지금은 디즈니랜드처럼 됐다"고 비판기도 했다.
트럼프는 지난 2월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등은 미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장벽 건설을 통해 범죄자나 불법 이민자들을 차단하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불법 이민자는 1100만명 수준이다. 이들 중 65% 정도가 합법적으로 입국했다가 체류기한을 넘겨 불법 이민자가 된 사람들이라고 영국의 인디펜던트紙는 보도했다.
과거 미등록 이민자 출신으로 현재 텍사스대에서 남미 이민자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나디아 프로레스는 구조적으로 미국 사회는 이민자들에 대한 노동력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장벽이 있든 없든 노동자들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분석했다. 일반 미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밑바닥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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