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나치 문학인을 모아 놓은 가짜 인명사전
-‘21세기 한국 악인 열전’은 언제 누가 쓰려나
2014년 하반기부터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소설 한 편을 써야겠다는 충동이 솟구쳐서다. 당시 인기 있던 국내외 작가의 작품을 뒤져 읽었고, ‘소설 쓰기의 모든 것’ 같은 제목의 소설 작법도 여러 권 읽었다.
그러다가 칠레 태생인 로베르토 볼라뇨(1953~2003)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이 내(가 앞으로 쓰게 될) 소설이 벤치마킹할 만한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볼라뇨의 책은 일종의 ‘악인 열전’이다. 볼라뇨는 가상의 나치 추종자들의 전기를 창조해 책에 담았다.
볼라뇨는 1999년 스페인어권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몰로 가예고스상을 받는 등 아주 짧은 기간에 20세기 말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작가의 한 명으로 부상한 작가다.
내가 소설을 쓸 생각을 한 2014년은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이 뒤덮인 해다. 하지만 나를 소설의 바다로 밀어 넣은 건 세월호가 아니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한 달 전쯤 새벽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내 발목을 닻줄처럼 묶었다. 예순 넘은 수천억 원대의 재력가가 무참히 살해된 이 사건은 세 달 뒤 범인이 붙잡히면서 세월호 사건의 보도 쓰나미 속에서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그 무렵 한국 사회의 온갖 병리를 다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0대 현직 서울시의원이 청부한 살인사건이었다. 범행 동기는 죽은 재력가의 협박. 시의원은 재력가에게서 거액의 뇌물과 향응을 받았으며, 재력가는 뇌물과 향응의 대가로 자신의 부동산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도록 도시계획을 바꿔달라고 시의원에게 청탁했다. 시의원은 도시계획 변경이 자기 능력 밖임을 알게 됐으며, 시의원의 일 처리가 시원치 않자 재력가는 뇌물로 준 돈을 갚으라고 협박했다. 시의원이 재력가에게 써준 5억 원짜리 채무계약서가 협박 무기였다.
시의원은 정치적·사회적 매장이 두려워 예전에 자신에게 빚을 진 고교 동창에게 빚 탕감을 조건으로 재력가를 죽여 달라고 청부했다. 동창은 서울 내발산동 재력가의 사무실에서 재력가를 죽이고 중국으로 달아났으나 붙잡혔다. 그가 붙잡히기 직전, 시의원은 “체포되면 자살하라”고 지시한 것이 드러났다. 재력가의 금고에서는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이 줄느런히 적힌 ‘뇌물장부’도 발견됐다.
정치인과 재력가, 이권과 뇌물, 돈 많은 노인의 탐욕과 음흉함, 야심 많은 젊은이의 간계와 사악함.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두 사람 모두 파멸한 이 사건은 이 외에도 소설적 요소가 많았다. 시의원과 동창이 체포된 뒤에도 언론은 두 사람의 삶을 추적해 많은 이야기를 내놓았다.
시의원은 형과 함께 고향에서는 촉망받는 똑똑한 형제로 꼽혔다는 것, 서울의 진보적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지낸 동생은 그런 경력을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시의원이 되었다는 것, 형은 동생이 시의원이 되기 전에 검사가 되어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비리를 저질러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변호사가 된 형이 경기도의 한 골프장 사장을 납치해 돈을 뜯으려다 붙잡혀 동생보다 먼저 범법자로 전락했다는 기사가 잇달아 실렸다.
삶의 부침과 굴곡은 피살된 재력가의 것도 시의원 형제의 그것 못지않았다. 서울 강서구에서 대한항공 다음으로 많은 세금을 냈다는 그는 원래 서울 시내버스 기사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내발산동 일대에 부동산을 사뒀던 한 재일동포가 한국의 먼 여동생에게 부동산 관리를 부탁하면서 그는 버스 기사에서 수천억 원대의 재력가로 신분이 급상승한다.
재일동포의 먼 여동생인 아내와 함께 재일동포의 재산을 관리하던 그는 재일동포가 숨지고 유족이 한국 재산을 챙길 여유가 없게 된 사이 이 재산을 자기명의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사문서 위조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교묘하고 치밀한 소송 작전을 벌인 끝에 관리인에서 회장님으로 승천했다.
재일동포의 삶도 기구했다.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대금업을 하면서 지독하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엄청난 부자가 됐지만 동포 사회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아흔을 앞두고 사망했다. 그의 사후 일본 검찰과 세무서는 그가 남긴 현찰 60억 엔을 찾아냈고, 유족은 일본 사상 최대의 탈세혐의로 재판을 받느라 재력가가 제기한 소송에 대처하지 못했다.
‘시의원 재력가 청부살인 사건’을 더 발전시켜 ‘악인열전’을 만들어 볼 생각은 그 얼마 뒤에 시작됐다. 볼라뇨처럼 악인들을 창조할 필요도 없었다. 내 기준의 악인들이 자꾸 나타났다. 한 국회의원은 승용차 뒷자리에 둔 몇 천만 원의 현금을 도둑맞았다. 범인은 승용차 기사였다. 그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돈이라고 생각하고 훔쳤다. 신고가 안 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자산 규모가 몇 조원은 될 중견 건설 그룹 회장이 하도급업체 사장들을 반강제로 불러내 내기 골프를 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그에게서 일을 얻으려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했던 광고업체 사장을 통해 그의 천하고 가혹한 행각을 들은 게 있는지라 그도 나의 악인열전 명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에는 국세청장과 장관까지 지냈던 사람이 오랜 해외도피를 끝내고 귀국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소신과 청렴결백이 출세의 무기였던 그의 가족들이 강남 요지의 한 블록 가까운 금싸라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거졌다. 청렴한 세무공무원으로서는 아무리 아끼고 모아도 한 평을 사기 힘든 땅을 그의 일가가 한 블록이나 깔고 앉아있었다.
악행의 사례는 웬만큼 모았으니 이제 볼라뇨처럼 악인들을 창조해 그들의 전기를 새로 꾸며내기만 하면 된다. 한국의 병리를 날카롭게 드러낼 소설이 곧 태어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웬 걸,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세월호에 이어 촛불과 탄핵이라는 소설보다 더한 기막힌 현실이 나를 주저앉혔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악행이 드러났으며 그것들을 이용해 잇속을 차리려는 간교한 악인들이 놀부가 박을 타자 뛰쳐나온 도깨비처럼 줄을 이었다. 악인들의 행렬은 지금도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악인들에 비하면 내 주인공들의 악행은 약소했다.
넘쳐나는 악인들로 이야깃거리는 전보다 더 풍성해졌다. 그러나 한갓 잡문에나 어울릴 내 능력을 벗어났다. 어떤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나 대신 ‘21세기 한국 악인열전’을 내놓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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