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리라."(가곡 '청산에 살리라' 중)
'비운의 책사' 고(故) 정두언 전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이 지난 16일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야수가 바글바글한 '비루한 정치판'에서 정 전 의원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도덕과 권력,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후자보다는 전자를 택한 탓이다. '권력 놀음'이 판치는 현실 정치에서 그는 영원히 비켜섰다.
'엘리트 공무원'에서 '정권의 개국공신', '프로 가수', '시사평론가', '음식점 사장' 등으로 20년간 종횡 무진한 현세의 삶을 마감했다.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음유시인 '인간 정두언'의 삶은 끝났지만, '합리적 개혁'을 향한 그의 정신만은 영원하리라.
◆일찍이 밀려난 정두언…'만사형통 퇴진' 55인 파동 주도
"정두언 전 의원 산에서 숨진 채 발견." 지난 16일 오후 4시 44분. 경찰발(發) 속보가 실시간 올라왔다. "그 정두언이 그 정두언?" 기사 마감이 한창인 기자들도 술렁였다.
곧이어 방송사 작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친이(친이명박)계에서도 아웃사이더라고 하더니…." 충격을 받은 듯한 그 작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 전 의원이 누구던가. 정 전 의원의 기세는 한때 하늘을 찔렀다.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후 행정고시(제24회)를 통해 공직자에 발을 들여놓은 정 전 의원은 2002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인 2002년 정 전 의원을 정무부시장으로 발탁했다. 정 전 의원은 MB의 업적인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7년 MB 대선후보 경선캠프에서 기획본부장을, 대선에서는 전략기획총괄기획팀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여의도 안팎에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옆에 '좌희정·우광재'가 있다면, MB전 대통령 옆에는 '좌두언·우두언'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MB정부의 '개국공신 1순위'로 정 전 의원을 지목하는 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정 전 의원과 함께 MB 정권 3대 축은 이상득·이재오 전 의원이 꼽혔다.
◆모두 까기 정두언이 남긴 것…"권력 사유화가 적폐"
그러나 정 전 의원은 일찍이 친이계 핵심에서 밀려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내부 권력투쟁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정 전 의원을 밀어냈다.
MB 정부 1년 차인 2008년 총선에서 정 전 의원이 '만사형통(모든 길은 형님으로 통한다)'으로 불린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퇴진을 촉구한 '55인 파동'을 일으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 전 의원은 '이상득·박영준' 등을 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정 전 의원의 정치 인생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MB 정부 말기에는 '저축은행 금품 수수 사건'에 연루, 10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이후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최종 선고받았지만, 정치적 상처는 단기간에 아물지 않았다. 2년 뒤 2016년 총선에서 낙선한 정 전 의원은 '정치적 외톨이'로 전락했다.
몇 번의 자살 시도는 정 전 의원이 죽고 난 이후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갈 곳 없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모두 까기'인 정 전 의원이 설 곳은 없었다. 친박계(친박근혜)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앞서 정 전 의원은 2009년 세종시 수정안 파동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제왕적"이라고 비판했다.
◆정두언이 사라지자 소장파가 없어졌다
그는 올해 초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로부터 주중대사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의원은 지난 3월 2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주중대사직을 제안과 관련해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며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전략가'이자, '아이디어맨'인 정 전 의원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는 얘기다. MB 정부 출범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반대 촛불집회로 정권이 흔들릴 당시 4대강 사업을 통한 이슈 전환을 주도한 것도 정 전 의원이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 전 의원이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둔 이후 없어진 현상으로 '소장파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한때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원희룡 제주도지사 등과 함께 '한나라당 정풍 운동'을 이끌었다. 정 전 의원이 선후배들에게 남긴 한국 정치의 과제다.
정 전 의원이 별세한 지 닷새가 지난 22일에도 그의 정신은 여의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정 전 의원이 별세 전 등록한 '높은뜻광성교회' 이장호 목사는 "나는 영혼을 안내하는 담임목사인데 그 고통 중에 함께 해주지 못했고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괴로움이 밀려왔다"고 토로했다. 너무 아파하지 마시라.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건 남은 우리의 몫이다. 정 전 의원은 교활함도 위선도 없는 그곳에서 영면하시기를….
'비운의 책사' 고(故) 정두언 전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이 지난 16일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야수가 바글바글한 '비루한 정치판'에서 정 전 의원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도덕과 권력,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후자보다는 전자를 택한 탓이다. '권력 놀음'이 판치는 현실 정치에서 그는 영원히 비켜섰다.
'엘리트 공무원'에서 '정권의 개국공신', '프로 가수', '시사평론가', '음식점 사장' 등으로 20년간 종횡 무진한 현세의 삶을 마감했다.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음유시인 '인간 정두언'의 삶은 끝났지만, '합리적 개혁'을 향한 그의 정신만은 영원하리라.
◆일찍이 밀려난 정두언…'만사형통 퇴진' 55인 파동 주도
곧이어 방송사 작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친이(친이명박)계에서도 아웃사이더라고 하더니…." 충격을 받은 듯한 그 작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 전 의원이 누구던가. 정 전 의원의 기세는 한때 하늘을 찔렀다.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후 행정고시(제24회)를 통해 공직자에 발을 들여놓은 정 전 의원은 2002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인 2002년 정 전 의원을 정무부시장으로 발탁했다. 정 전 의원은 MB의 업적인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7년 MB 대선후보 경선캠프에서 기획본부장을, 대선에서는 전략기획총괄기획팀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여의도 안팎에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옆에 '좌희정·우광재'가 있다면, MB전 대통령 옆에는 '좌두언·우두언'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MB정부의 '개국공신 1순위'로 정 전 의원을 지목하는 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정 전 의원과 함께 MB 정권 3대 축은 이상득·이재오 전 의원이 꼽혔다.
◆모두 까기 정두언이 남긴 것…"권력 사유화가 적폐"
그러나 정 전 의원은 일찍이 친이계 핵심에서 밀려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내부 권력투쟁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정 전 의원을 밀어냈다.
MB 정부 1년 차인 2008년 총선에서 정 전 의원이 '만사형통(모든 길은 형님으로 통한다)'으로 불린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퇴진을 촉구한 '55인 파동'을 일으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 전 의원은 '이상득·박영준' 등을 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정 전 의원의 정치 인생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MB 정부 말기에는 '저축은행 금품 수수 사건'에 연루, 10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이후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최종 선고받았지만, 정치적 상처는 단기간에 아물지 않았다. 2년 뒤 2016년 총선에서 낙선한 정 전 의원은 '정치적 외톨이'로 전락했다.
몇 번의 자살 시도는 정 전 의원이 죽고 난 이후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갈 곳 없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모두 까기'인 정 전 의원이 설 곳은 없었다. 친박계(친박근혜)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앞서 정 전 의원은 2009년 세종시 수정안 파동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제왕적"이라고 비판했다.
◆정두언이 사라지자 소장파가 없어졌다
그는 올해 초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로부터 주중대사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의원은 지난 3월 2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주중대사직을 제안과 관련해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며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전략가'이자, '아이디어맨'인 정 전 의원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는 얘기다. MB 정부 출범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반대 촛불집회로 정권이 흔들릴 당시 4대강 사업을 통한 이슈 전환을 주도한 것도 정 전 의원이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 전 의원이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둔 이후 없어진 현상으로 '소장파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한때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원희룡 제주도지사 등과 함께 '한나라당 정풍 운동'을 이끌었다. 정 전 의원이 선후배들에게 남긴 한국 정치의 과제다.
정 전 의원이 별세한 지 닷새가 지난 22일에도 그의 정신은 여의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정 전 의원이 별세 전 등록한 '높은뜻광성교회' 이장호 목사는 "나는 영혼을 안내하는 담임목사인데 그 고통 중에 함께 해주지 못했고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괴로움이 밀려왔다"고 토로했다. 너무 아파하지 마시라.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건 남은 우리의 몫이다. 정 전 의원은 교활함도 위선도 없는 그곳에서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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